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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승우 Nov 05. 2023

꽃을 부러워한 정원사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세계에서

Y는 자신의 목소리가 싫다고 했다. 그녀가 부러워한 것은 데이비드 커버데일이나 에릭 마틴 같은, ‘쇳소리가 두 개로 쪼개지는 듯한’ 목소리였다. 저런 목소리 있으면 나도 끝내주는 음악 할 거라고, 담배 많이 피워도 목소리는 안 바뀐다는 Y를 보고, 나는 어이가 없어서 그러다 폐암 먼저 걸려 죽을 거라고 말하곤 했다.


나는 Y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녀의 재능과 사랑에 빠졌다. 나는 재능을 알아보는 내 재능에 확신이 있었다. 그녀는 그야말로 거대한 재능의 덩어리였다. 처음 그녀의 노래를 두 마디도 채 듣지 않고, 나는 좋다는 말 외에 형용이 안 되는 자신의 한계에 화가 났다. 한번은 그녀가 어느 공연에서 스팅의 ‘Shape Of My Heart’를 무반주로 불렀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자리에 있지 않았음에도 스틸컷처럼 떠올릴 수 있었다. 오로지 아름다운 소리를 위해 존재하는, 시공간마저 숨을 죽인 듯한 그 순간의 공기를.


그래서 나는 Y의 태도가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다. 그녀는 스스로의 잠재력을 자각하지 못하고 뜨뜻미지근하게 낭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학교 과제로 쓴 곡으로 얼떨결에 데뷔했고, 주위의 호들갑에 앨범을 냈지만, 거기까지였다. 그 뒤로 그녀의 행보는 산만하고 게으르게 보이기까지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Y를 다그쳤다. 빨리 곡 써서 앨범 내라고, 인생에서 제일 반짝이는 시기를 낭비하면 안 된다고. 그때마다 그녀는 침울하게 말했다. 알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앞이 안 보여.


어느 날, Y는 태어나서 한 번도 웃어본 일이 없다는 듯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새벽에 어떤 남자한테 고백했다고 했다. 그 남자는 예술종자 특유의 미성숙한 정신머리와 유아적 언행으로 무장한 인간이었고, 덕분에 그녀는 자코메티의 조각상처럼 말라가는 중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기에 그녀는 반짝반짝 빛나는 작품을 하루에 하나씩 토해냈다. 하루는 그녀가 말했다. 요즘 곡이 너무 잘 써져. 슬퍼서. 연주도 잘 돼. 마음이 아프니까.


그러나 그 노래들은 세상에 나오지 않고 봉인되었다. 그 남자에 대한 Y의 마음이 유통기한이 다 됐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때가 음악가로서 그녀의 피크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직 갈고 닦일 부분이 무수한 끝 모를 재능이, 존재 자체로 음악이 넘쳐흐르는 듯한 매혹적인 영혼이, 갈수록 평범해지는 과정을 나는 고스란히 보았다. 그건 지켜보는 사람은 보는 사람대로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프랭크>에서 프랭크 아닌 존이 자꾸 눈에 밟힌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존은 프랭크와 그의 밴드를 유명해지게 하는 데 성공하지만, 그 끝은 파국이었다. 존은 프랭크에게 종용한다. 가면을 벗고 세상으로 나오라고. 당신이 외면하는 고통과 마주해야 한다고. 그러나 알고 보니 프랭크에게는 존이, 그리고 관객이 기대했던 천재의 드라마틱한 비화는 있지도 않았다. 그는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으며, 어렸을 때 아버지가 만들어준 탈을 뒤집어썼을 뿐이었다. 그의 괴랄한 재능은 영적인 산물이 아닌, 그저 보통 인간의 특징적인 요소였다. 그에게는 걸을 때 오른발을 내밀면 왼팔이 나가는 것만큼 당연한 감각이었을 뿐이다.


존은 꽃을 부러워한 정원사였을 것이다. 재능은 보잘것없는 주제에 우주 대스타가 되고 싶다는 욕망은 차고 넘치는, 살다 보면 드물게 만나는 것도 아닌 그런 사람.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존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프랭크를 큰 무대로 끌어올린 게 비록 다분히 속물적인 허영을 때문이었다 해도, 비록 얄팍한 잔재주를 부렸다가 마뜩잖은 결과를 낳았다 해도, 그 행동에 사심 없는 진심이 조금도 없었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그는 프랭크의 재능을 알아본 것이다. 재능을 알아보는 재능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존은 프랭크를 세상에 보이고, 그가 제일 빛나는 순간에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서 그 풍경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 재능이 보석이 되는 순간을 상상하는 꿈, 그리고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초조함을 프랭크에게 투영했던 것이다. 다만 방법이 성급하고 서툴렀을 뿐.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소룸이 끼치도록.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 Y는 애초에 독보적이거나 화려한 아티스트가 되고 싶은 자의식이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자신은 그저 좋은 연주자가 되고 싶어서 음악을 시작했는데, 뜻하지 않게 싱어송라이터로 주목받게 된 상황이 너무 낯설고 혼란스러웠다고 고백했다. 내가 그녀를 알게 된 지 십사 년이나 지나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Y는 지금도 여전히 연주를 하고, 소소하게 영상 음악을 만들고, 학교에서 강의를 하며 두 아이를 키우고 있다. 여전히 음악계에서는 유명하고 유능한 사람이지만, 대중의 기억에서 예전의 이미지는 거의 희미해졌다. 나도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별 감정 없이 볼 수 있게 됐다. 지금은 그건 그것대로 좋은 거구나, 하고 무표정하게 생각하게 됐다.


그래,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세계에 있을 때 빛나는 사람도 있는 거야. 그 아무것도 아님을 아무것도 아닌 채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는 거고. 그런 건 처음부터 요만큼의 문제도 뭣도 아니지. 누군가 그걸 억지로 끌어내려 한 게 잘못일 뿐이다. 자그마한 희노애락에 기뻐하고 슬퍼하는 무채색의 행복도 있는 거니까. 그 단순한 진리를 깨닫기까지 그렇게 오래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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