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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란 Apr 22. 2024

<토지> 서희를 만나러 가는 길

지리산 하동군 평사리를 가다

지난주 지리산 하동을 갔다. 벚꽃은 다 떨어지고 지역 축제도 끝나, 꽃놀이로 가는 여행은 아니었다. '등린이도 갈 수 있는 지리산 노고단'이라는 숏폼 비디오를 본 S가 이야기를 꺼냈고, 나는 냉큼 날짜를 정하고 숙소를 예약했다. S는 노고단에서 내려다본 산아래 풍경과 탁 트인 하늘 영상을 보고 여행을 결심했겠지만, 나의 여행은 박경리 작가의 <토지> 책을 당근에서 중고로 사면서부터 시작되었었다. 


월선이가 용이를 기다리던 섬진강 나루터, 최치수가 강포수와 헤매던 지리산, 윤씨부인이 서희에게 보여주었던 너른 땅, 우관스님이 계신다는 영곡사. 예전에는 전혀 관심 없었던 곳들을 책을 보면서 언젠가는 꼭 한번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가보지 않는다면 아무리 책을 본들, 인터넷으로 검색해 본들 해결되지 않는 갈증에 계속해서 허덕일 것 같았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니, <슬픔을 아는 사람> 책을 읽고 작가인 유진목 시인의 시 수업을 수강신청했던 것이나, <오늘도 자람>이라는 책을 보고는 이자람씨의 공연을 보러 갔던 것과 비슷했다. <이만하면 달콤한 인생입니다>를 읽고는 저자인 고영주씨가 운영하는 카카오봄을 가보고 싶었는데, 책을 다 읽을 때 즈음 카카오봄 카페가 영업을 종료해서 나는 영원히 그곳을 갈 수 없게 되었다. 그때의 아쉬움이 여전히 남아있었는지, <토지>를 한 권 한 권 읽어갈 때마다 얼른 이 책을 다 읽고 그곳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여행 계획은 일사천리로 세워졌지만, 나는 겨우 3권을 읽고 있었다. 아무래도 다 읽고 가는 것은 무리였다. 며칠을 늦게 자면서까지 읽었지만 맛깔난 경상도 사투리와 소설의 흐름을 차근차근 따라가기에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이 재미난 것을 후루룩 국수 마시듯 먹어치우고 싶진 않았다. 우리는 우선 화개장터를 들르고 근처 다원을 들렀다가 박경리 문학관을 가기로 했다. 이튿날 지리산 노고단을 가고, 시간이 된다면 남원에 들렀다 마지막날 무주 덕유산을 가기로 했다. 


나는 소도시나 시골여행을 갈 때마다 오일장 같은 지역장터를 들른다. 제주도 세화 민속 오일시장을 들러 젓갈을 사고, 군산 수산물 시장에서는 갑오징어를, 여수에는 마른 멸치를 샀다. 블라디보스톡 광장 시장에서는 꿀을, 마드리드 엘라스트로 벼룩시장에서는 오래된 성모상과 털모자와 장갑을 샀다. 흥정하는 사람들과 판매한 물건을 포장하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지역 특산물을 기념품처럼 사곤 했다. 물건을 사면서 여행이 아니라 짧게나마 살아보는 기분을 내기도 하고, 그렇게 사 온 물건들을 볼 때마다 그곳이 생각나 추억이 좀 더 지속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4시간 반 운전 끝에 도착한 화개장터는 관광객을 위한 곳이 되어있었다. 더 이상 현지인의 장터역할을 하지 않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시장을 천천히 한 바퀴 돌아보고 있으니, 또 다른 소도시나 시골에서 놀러 온 것으로 보이는 단체 어르신 관광객들이 몰려왔다. 빨간색 알록달록한 등산복을 입고 똑같은 이름표를 목에 걸고 여기저기를 구경하는 어르신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몇몇 분들은 엿장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트로트에 몸을 실어 장단을 맞추고 있었다. 작고 구부정해진 귀여운 할머니 할아버지를 보며 수수부꾸미와 달콤 시원한 식혜를 시장 중간 정자 같은 곳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먹었더니, 아쉬움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 여새를 몰아 엄마에게 필요한 우슬(소무릎을 닮았으며, 무릎 관절에 좋은 약재)을 사고 다원으로 향했다. 


다원은 보성이나 제주도에서 본 것처럼 탁 트인 풍경을 제공하는 넓은 곳은 아니었지만, 카페 사장님의 안내를 받아 올라간 곳은 다원 건너편 산과 하늘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었다. 탄성을 지르며 자리를 잡은 우리는 뜨거운 찬물을 식히고, 작은 찻주전자에 따르고, 우러난 차를 더 작은 찻잔에 따르며 바쁜 듯 호젓한 듯 풍경을 즐겼다. 사철 푸른 나무의 짙은 녹음 사이사이로 새로 난 이파리의 연둣빛과 아주 띄엄띄엄 보이는 붉은 단풍나무로 인해 봄은 가을 못지않게 알록달록 쾌활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다 가까이 다가가면 이름 모를 작은 노란색 흰색 꽃들이 길 옆에 나있어서, 실수로라도 밟을까 봐 조심스러웠다.


해가 길어질 때 즈음 이동하여 찾은 박경리 문학관은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대한 곳이었다. 그곳은 섬진강과 그 너머 넓은 평야를 바라보고 있었다. 입구에서 건물까지 가는 길에는 박경리작가의 글들이 원고지 모양의 대리석판에 새겨져 있었다. 돌에 새긴다는 것은 그냥 적어두고 보는 것과는 좀 다르다. 비와 눈이 내릴 때나, 뜨거운 태양빛이 이글거릴 때나, 세월에 상관없이 여전히 그곳에 남아있다는 것이니까. 그만큼 많은 사람의 기억에 남을 것이고,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 모든 것이 변하는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주는 무게감은 남다르다. 그래서 돌판에 새기는 글은 심장에 남는다. 나도 그런 글을 쓸 수 있을까.


박경리 문학관과 최참판댁 촬영장은 <토지>를 읽은 사람에게는 보물찾기 놀이터 같은 곳이기도 하고, 나처럼 다 읽지 않은 사람에게는 스포일러 투성이인 지뢰밭이었다. 나는 드라마도 한번 보지 않았고, 누군가에게 그 줄거리를 들어본 적도 없었다. 토지를 읽으며 신나서 엄마에게 이야기하지만 "스포하지 마!" 라며 엄마의 입은 틀어막기 일쑤였으니까. 대한민국에서 토지 내용을 모르고 책을 보는 사람이 있단 말이야? 싶겠지만, 그게 바로 나다. 


그런데, 나는 이 여행을 준비하면서부터 와르르르 스포 당했다. 촬영지 앞의 카페와 음식점들을 지도에서 살펴보다가 '서희와 길상이'라는 가게이름을 보고는 '머야! 봉순이가 아니라 서희였어?'라고 화들짝 놀랐었는데, 그건 이제부터 벌어질 어마어마한 스포일러의 시작이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박경리 문학관에서 서희가 간도로 이동한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 용이의 사랑이 어떻게 되는지, 훈이와 별당아씨는 어떤 운명을 맞이하게 되는지도 처음 알았다. (나처럼 전혀 모르고 토지를 읽고 계신 분을 위해 여기서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겠다) 박경리 작가의 기운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이곳에서 신성함마저 느끼다가도, 아! 하는 탄식과 함께 아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책 좀 더 빨리 많이 보고 올걸!' 하는 후회는 발걸음을 옮기는 내내 들었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여행을 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우 백여 년 전의 삶인데 이렇게 다르다는 걸 몸소 느끼면서, 소설 속의 사람들이지만 실제 했던 것처럼 기뻐하고 아쉬워하는 기분은 책 만으로는 부족할 듯하다. 그리고 최참판댁에 온 기분을 더 온전히 느끼고 싶어 바로 뒤에 있는 한옥호텔에서 쉬었다. 단정한 한옥과 잘 정리된 마당을 보면서 잠시나마 서희가 된 기분을 느끼기도 하고 아쉬운 마음으로 아침 동네를 산책하다가 체크아웃을 했다. 가을즈음에는 꼭 <토지>를 완독하고 좀 느긋하게 이 호텔에서 쉬어볼 생각이다. 아침잠을 깨울정도로 시끄럽게 지저귀던 새들의 소리나, 각양각색의 초록색이 아름다웠던 평야와 산의 경치를 떠올리면, 책이 좀 지루해져도 끝까지 잘 읽어낼 수 있을 것 같다. 이곳에 다시 오는 건 완독 한 나에게 주는 선물일 테니 말이다. 그러다 갑자기 '완독을 하면 그때는 성인이 된 서희를 만나러 간도를 가야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평사리가 아니라 중국인가? 가을에 가면 춥겠네? 책을 더 빨리 읽어야하나? 라는 자질구레한 생각들이 계속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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