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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란 May 21. 2024

원두의 변신

SNS를 뒤적거리다, 블루보틀 스튜디오가 새로 오픈했고 7주간 8가지 코스로 커피를 즐길 수 있다는 소식을 보았다. 뭔가 새로운 장소나 이벤트 같은 것들을 큐레이션 해서 알려주는 계정이었던 것 같은데, 그게 어디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내 기억력은 여하튼 끝내주게 문제가 있는 듯하다. 게다가 7주간만 진행한다고 하니, 리미티드에 사죽을 못쓰는 나는 냉큼 캘린더를 열어 가장 안전한 날 중 하나를 택해서 곧바로 예약했다. 예약은 했지만 그 과정이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것은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뒤적거리다가 발견한 정보였고, 매우 졸렸고, 졸린데도 가고 싶었고, 자고 일어나면 생각나지 않을 것 같다는 불안감이 들어 잠결에 예약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함께 가자는 내 말에 남자친구는 '좋다'라고는 했는데, 이어서 하는 질문들, 가령 '어디서 하는지, 어떤 코스인지' 같은 질문에는 제대로 답을 할 수 없었다. 그저 7주간 한정이라는 말에 결제를 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선결제 후검색을 해보니, 디저트를 포함한 8가지 코스였고, 예전에 S와 가본 삼청동 지점인 듯했다. 그리고 아무래도 그날은 아침커피를 걸러야 할 것 같았다. CPP (씨뿔뿔)에 놀러 갔다가 얻어마신 커피 덕분에 잠을 제대로 못 이뤘던 흥분되던 그날을 떠올리면, 이날도 마찬가지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조금 일찍 도착해 그 주변에서 파스타와 덮밥을 먹고, 정독도서관에 갔다. 평일 낮 그곳은 한가로웠고, 구름이 적당히 낀 날이라 햇빛이 부담스럽지 않았다. 잔디밭에는 '잔디를 보호해 주세요'라는 푯말과 동시에 책을 읽을 수 있는 빈백과 의자, 2단 책장에 가득 꽂힌 책들이 있었다. 잔디를 보호하기 위해 잔디를 밟으면 안 되지만, 빈백에 기대 책을 읽으려면 잔디를 밟을 수밖에 없었다. 잔디를 보호하고 싶기도 하고 동시에 잔디밭을 즐기기도 싶은 이 이중적인 마음은 다이어트 때문에 버터와 설탕이 들어간 빵을 멀리하고는 있지만, 결국 사워도어에 버터를 듬뿍 올려먹는 것 같은 묘한 마음이랄까. 토실토실 살이 오른 아기를 만지기 미안하면서도 동시에 그 볼을 살짝 깨물고 싶은 마음이랄까. 책장 파먹기를 하기로 결심했지만, 사고 싶고 사야 할 책들이 부쩍 늘어서 우물쭈물하게 되는 마음이랄까. 통장잔고를 생각하면 취업하는 게 맞지만 영원히 취업하지 않고 글만 쓰고 싶은 마음이랄까. 요즘 내가 매일 느끼는 그런 마음 같았다. 


정독도서관 잔디밭에서 책을 뒤적거리며 비둘기가 잔디 밟는 소리를 들으며 한 시간 정도를 휴식하니, 예약한 시간이 다가왔다. 8코스나 되는 커피의 향연을 만나기 위해 나는 화장실에도 들르고 물도 마시고 만반의 채비를 하고 정해진 장소로 갔다. 


삼청점 매장에 가니 우리를 기다리는 직원이 있었고, 몇 분의 시간을 기다리던 우리는 건물을 빙 둘러 작은 한옥 골목으로 직원의 안내를 받아 들어갔다. 그곳의 문지방을 넘어 들어가니, 중간에는 작고 매우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정원이 있었고, 그 정원을 중심으로 ㄷ(디긋) 자로 공간이 있었다. 공간은 정원을 볼 수 있게 통유리로 되어있었다. 게다가 그곳엔 우리 커플 외 다른 한쌍의 커플이 있어 공간은 한적했고, 나도 모르게 핸드폰을 꺼내 여기저기를 연신 찍어댔다. 


그날 8코스의 첫 잔은 '이게 커피라고?'라는 생각이 드는 맑은 보리차 같은 차였다. 색깔은 보리차보다도 더 옅은 색이었고, 날것의 풀향과 함께 된장콩 맛이 나는 묘한 차였다. 그러면서도 깔끔한 뒷맛이 개운했는데, 알고 보니 커피 껍데기 안에서 발표가 된 원두 생두를 차로 만든 것이었다. 커피를 기대한 나는 충격이었고, 그렇다고 이것을 커피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어서 또 한 번 충격이었다. 8코스는 은은한 향과 맛의 차로 신선한 충격을 주며 시작했다. 그 이후 인스턴트커피, 롱컵, 숏컵, 카페오레, 술이 섞인 커피 등등 갈수록 점점 진득하게 즐기다 보니 어느덧 한 시간 반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각 커피들의 맛이, 신선한 충격이 궁금하다면 예약해서 한번 경험해 보길 바란다. 그렇다. 여기는 그냥 커피 맛을 본다기보다는 커피의 시작과 끝, 그리고 그 과정을 맛과 향, 공간과 음악, 그리고 바리스타와의 대화와 함께 경험하게 된다. 


그냥 그날 즐거웠다고 이야기하려고 이 글을 쓴 것은 아니다. 모든 코스가 다 끝나고 나서야 깨달음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처음에 마신 그 차가 후반에 마신 에스프레소 같은 진한 숏컵커피와 같은 원두였다는 점이었다. 그 원두는 풀향이 나서 자연이 생각나는 맑은 차의 느낌을 주었다가, 융드립으로 에스프레소만큼 오히려 더 진하게 다가와서 입안과 머리를 울릴 정도로 시큼하고 진한 맛을 선보이다가, 우유를 섞자 처음과는 전혀 다른 고소한 맛이 되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전혀 연관성 없는 향과 맛이었는데, 그게 같은 원두였다는 건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처음엔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8코스는 생각보다 빠르게 끝나버렸다. 아쉬운 마음에 중정의 정원을 더 바라보다, 직원분의 도움으로 인증샷을 찍고 들어왔던 문지방을 넘어 그 공간을 벗어났다. 그러면서 상상을 능가하는 원두의 변신을 계속해서 곱씹었는데, 그게 마치 우리 모습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아는 사람들도 알고 보면 다양한 모습이 있고, 그걸 어느 특별한 순간에 발견하기도 한다. 그리고 나 또한 내 안에 숨겨져 있던 모습들을 발견하고 있는데, 그렇게 달라져도 될까 하는 걱정과 함께 색다른 내 모습에 내가 설레기도 한다. 지난 20년간 직장인으로 살아온 모습이 처음 마신 맑은 차였다면, 글을 쓰고 좋아하는 것들을 시도하고 찾아가는 요즘의 모습은 융드립으로 내린 진한 커피가 되는 과정은 아닐까. 그러다 고소한 라테 같은 모습으로 또 변신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남아있던 걱정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작가로도 자리 잡을 수 있을까? 성공할 수 있을까? 잘 한 선택일까?라는 걱정보다 이날만큼은 달라진 향과 맛의 진한 숏컵 커피가 될 수 있겠다는 흥분감이 나를 감쌌다. 


공기 중에 붕붕 떠있는 이 기분이 커피 카페인 때문인지, 변신하는 내 모습에 대한 기대감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온종일 기분이 좋아서 남자친구에게 이것도 좋다 저것도 좋다를 연발했다. 그 기분에 취해 근처 팝업샵에서 핑크색 작은 가방을 충동구매하고 마트에서 또 와인을 사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다이어트 중이라 가급적 금주하고 있다) 그래도 그 가방을 보면 나는 이 날을 기억하고, 한알의 원두가 연두색에서 갈색으로 변신해 진한 커피가 되어 한 방울 똑 떨어지는 상상을 할 것이다. 그럼 어느새 쌓여있던 불안감을 나는 다시 툭툭 털어내고 핑크빛 미래를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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