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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란 Oct 15. 2024

생선 잘 발라먹는 아이

그 애는 늘 입버릇처럼 난 수지랑 결혼할 거야라고 말했다. 수지는 내 엄마 친구의 딸이고 내 남동생 친구의 여동생이었다. 그러니까 동생 친구의 동생이니 한참이나 어린 동생이다. 나는 그때 초등학교 저학년이었고 그 애는 나랑 동갑이었고 수지는 우리가 살아온 시간의 절반도 아직 살지 않은 어린아이였다. ‘그렇게 어린 아이랑 결혼을 한다고? 저런 아기를?‘ 수지를 업거나 목마를 태워 다니는 그 애를 보면 둘이 결혼하는 것은 절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덕분에 수지는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언니 오빠들과 함께 놀았다. 그때는 나이가 한두 살만 차이나도 무리에 잘 껴주지 않았었다.


복도형 아파트에 현관문을 열고 살던 때였다. 친구나 아는 동생이라고 할 수 있는 동네 아이들은 나와 동생이 있는 없든 복도에서 뛰어놀다 땀이 나고 더우면 문이 열린 집 아무 데나 들어가 “아줌마~ 물 주세요.”라고 외치고는 냉장고 문을 열어 마실 것을 꺼내 벌컥벌컥 마셨다. 엄마가 줄 때까지 기다리면 물이든 우유든 주스든 원하는 데로 컵에 따라 주었을 텐데, 애들은 늘 성격이 급하다. 바로 옆에 아줌마가 있지만 입을 대고 꿀꺽꿀꺽 마시고는 우다다 또 나가서 복도를 쿵쾅거리고 동네를 먼지 나게 뛰어다녔다. 그럼 엄마는 저녁 식사자리에서 아빠를 앞에 두고 누구네 애가 오늘 입 대고 물을 마셨느니, 우유를 마셨느니 같은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그 애는 그런 동네 아이들에 비하면 매우 어른스럽고 얌전했다. 엄마가 식사시간에 초대한 내 친구 중에 유일하게 아직까지도 가끔 칭찬하는 애다. 그 애는 생선을 잘 발라먹었다.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 그 애는 내 오른편에 앉았고, 엄마는 접시에 잘 구운 갈치 한토막을 올려 그 애 하나 나 하나 두고 맞은편에 앉아 우리가 먹는 걸 지켜봤다.


유치원에서 유일하게 젓가락질을 할 줄 알았고, 그래서 어떤 날은 선생님과 아이들이 모두 몰려와서 내 어른 젓가락질을 구경하기도 했었다. 그러니 갈치 발라먹는 것쯤은 이제 아무것도 아니었다. 가시가 목에 걸려 컥컥거릴 일이 무서워 피하는 일은 없었고, 게다가 갈치는 가장 좋아하던 반찬이었다. 그런데 우리를 멀뚱멀뚱 지켜보던 엄마는 그 애 얼굴을 보더니 “어떻게 이렇게 갈치를 잘 발라먹노? 로란아 너는 이렇게 못 발라먹겠나?”라고 감탄과 타박을 하는 거였다. 그게 뭐 그리 감탄할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려 그 애의 접시를 봤는데, 지느러미 쪽 가시는 잘 발라져 있었고, 부스러진 갈치살도 거의 없었다. 그 애는 레고 블록같이 갈치 살을 길쭉한 네모 모양으로 잘 발라서 입에 넣어 오물오물거리고 있었다. 그날 저녁 엄마는 아빠에게 ‘갈치 잘 발라먹는 신기한 아이’ 이야기를 했다. 졸지에 나는 갈치를 잘 발라먹지 못하는 아이가 되어버렸다. 나의 자랑거리가 하나 사라져 버렸다.


갈치를 잘 발라먹는 그 애는 키가 훤칠하게 컸다. 몸매도 호리호리하고 팔다리가 길어서 동갑이지만 나보다 오빠 같은 느낌이었다. 얼굴도 가무잡잡한 나와는 다르게 하얬다. 수지를 목마 태우고 걸어갈 때면 나는 옆에서 그 애 얼굴과 수지를 올려다봤다. 그럼 그 애 머리를 끌어안고 균형을 잡고 있는 수지가 너무 귀여워서 한참을 빤히 쳐다보곤 했다. 수지도 얼굴이 하얬고 입술이 발갛고 통통해서 앙증맞았다. 둘이 참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왜 나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기도 했었다. 그때 내 눈에 그 애는 갈치도 잘 발라먹고 결혼이 뭔지도 알고 있었고 누구와 결혼할지 계획도 세우는 어른이었다.


그날의 식사 이후로 아무도 시키지 않은 갈치 발라먹기 특훈이 시작되었다. 갈치구이나 조림은 좋아하는 반찬이라 식탁에 꽤 자주 올라오는 편이었는데 그럴 때마다 엄마는 똑같은 소리를 반복했다. ”니 친구 갈치 참 잘 발라먹더라. 아이가 참 신기하게." 그럴 때마다 나는 그에 질세라 훈련에 돌입했다. 그러다 제주도 갈치구이 전문점 이모의 현란한 갈치 바르는 스킬 못지않게 갈치를 바를 수 있게 되었다. 우선은 양 지느러미 쪽을 젓가락으로 길게 긁어낸다 그리고 살살 밖으로 빼면 지느러미 가시가 빠져나온다. 그럼 그 위의 살을 들어낸다. 한 번에 들어내다 살이 부서질 것 같으면 옆줄을 기준으로 반으로 나눠 먹는다. 그리고 등뼈를 살살 들어 올리면 아래 살이 접시에 붙어있어 그대로 먹으면 된다. 이 스킬은 잠들어 있다가 회사 회식 자리에서 가끔 발휘되기도 했었다.


그 애는 지금도 갈치를 잘 발라먹을까? 손으로 뭘 만드는 직업을 가지지는 않았을까? 수지랑 결혼은 했을까? 그땐 수지보다 두 배 길게 오래 산 우리가 어떻게 수지랑 결혼하냐며 티격태격했었는데, 이제는 굳이 못할 것도 없는 나이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나이가 되도록 갈치를 먹을 때면 늘 생각난다. 그 애는 수지랑 결혼해서 아이 낳고 잘 살고 있겠지. 그리고 그 아이에게 갈치살을 발라 숟가락에 얹어주고 있겠지.


그나저나 갈치 가격이 올라도 너무 올랐다. 요즘 아이들은 그때처럼 갈치 발라먹기 특훈 하기는 어려워졌다. 아쉬워서 어쩌나. 지느러미 가시를 잘 발라내고 넓적하고 도톰한 살을 부서지지 않게 들어 한입 가득 넣어 먹을 때 퍼지는 짭조름하고 고소한 풍요로움을 스스로 만들지는 못하겠구나. 나 또한 갈치 살 발라내는 현란한 기술을 자주 펼치지 못해 아쉽다. 기술이 녹슬기 전에 철이 지나기 전에 기름에 지글지글 구워 먹어 봐야겠다. 이번에도 엄마가 '갈치 잘 발라먹는 친구' 이야기 하나 안 하나 내기나 걸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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