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 숲>을 함께 읽은 북클럽에서 어떤 분이 <호밀밭의 파수꾼> 이야기를 꺼냈다. 청년의 방황을 그린 소설이라는 점에서 공통된 것 같다고, 다만 <호밀밭의 파수꾼>은 좀 더 철없는 소년의 방황기 같았고 공감하기가 어려웠다고. 그 말 한마디에서 '그 책 읽어봐야 하나?'라는 부채감이 혼자 싹을 키웠다. 그러다 얼마 전 카뮈의 <이방인>을 읽었는데, 그 말을 듣던 나의 사진선생님은 <호밀밭의 파수꾼> 책 이야기를 꺼내며 그건 어떻게 읽을지 내 생각이 궁금하다 하셨다. 싹만 틔워 아직 커가지 않았던 그 부채감은 갑자기 햇빛에 물을 머금고 부쩍 커져버린 것처럼 머리 한쪽을 가득 차지했고 결국 이 책을 집어 들게 되었다. 나의 생기 넘치던 20대, 색깔로 치자면 쪽빛에 가까운 푸른색이던 그 시절 책 좀 읽는 사람들은 다들 접했던 그 책을 마흔이 넘은 이제야 보게 되었다. 어쩌면 그 책 읽어봐야 하나라는 부채감은 그때부터 오랜 시간 씨앗으로 웅크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책을 보지 않았던 나는 무식하게도 정말 호밀밭이 무성한 시골에서 무언가를 지키고 선 남자 같은 것을 연상했었다. 그러나 배경은 아직 가보지도 못한 세련된 현대 도시 뉴욕이었고, 최소 중산층 이상의 잘 사는 집 둘째 아들의 반항기 같은 것이었다. 학교 공부에 취미를 붙이지 못하고 낙제하여 떠나게 된 십 대 후반 홀든이라는 소년이 친구와 싸운 뒤 짐을 싸고 예정보다 빨리 학교를 떠나 집이 있는 뉴욕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집에는 가지 않고 2박 3일 방황하며 거리를 쏘다니다 결국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다는 이야기다.
이 책의 첫인상은 '와 정말 대책 없다.'였다. 십 대 후반 사춘기의 으스대고 과장하고 꼭 어른인 척 센척하는 말투와 행동들이 첫 페이지부터 느닷없이 등장하여 전체를 덮고 있었다. 고전이든 현대 문학이든 책에서 보기 어려운 말투로 이 책은 강렬한 첫인상을 심어주었다. 이를테면, 엄청 짜증 나 죽을 거 같다, 토 나올 지경이다, 백만 년 만이다, 겁나 지루했다 같은, 생각해 보면 나 역시 십 대 때 괜히 입에 달고 다니던 말들이었다. 남들이 힐끗거리든 말든, 오히려 그 시선을 즐기듯 막 내뱉던 말들이었다. 아주 낯설진 않지만 이미 잊은 지 오래되어 화석처럼 남은 그 말들. 그 말들을 보니 그 시절 나의 촌스럽고 부끄럽던 시절이 생각나 이 책을 읽기가 좀 거북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책 중반을 넘어가는 순간부터 홀든이라는 소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어른인 척 호텔 바에 가서 숙녀들과 합석하고 술을 시키거나, 벨보이의 제안에 선뜻 넘어가 콜걸을 부르는 것은 그 특유의 말투처럼 센척하고 어른인 척하는 모습 같아 우습기도 어이없기도 했지만, 신분증이 없으니 콜라밖에 안 된다는 말에 순순히 수긍하거나, 콜걸이 와도 그저 대화를 하기를 원한다거나, 학생을 가르치러 온 수녀님을 보고 좋아하며 굳이 기부를 하는 장면이나, 어린아이가 호밀밭에서 사람을 잡았네 라는 콧노래 부르는 걸 보고 좋아하는 것에서 그 내면에 숨어있는 순수한 아이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했다. 어쩌면 그건 우리의 모습 같기도 했다. 우리 내면에도 순수한 어린아이, 혼란 가득한 사춘기, 규범을 깨버리고 싶은 반항아와 질서를 지키고 안전하고 싶은 모습까지 다양한 인간성이 존재하고 있고, 그것들은 서로 부딪히고 증폭하며 다양한 모순을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홀든은 어른이 되고 싶지만, 어린아이의 순수함을 잃어버리는 것이 두려운 중간자였다. 어린 시절 동생들과 즐겨 갔던 박물관을 가고 싶었지만, 막상 도착하자 갑자기 가기 싫어졌다며 돌아섰다. 홀든은 '아무도 달라지지 않을 거다. 유일하게 달라지는 건 우리다.'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여기서 그가 박물관에 들어선 순간 또다시 달라져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두려워서 그런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는 규범을 거부하고 깨뜨리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나름 선의 기준을 만들어 지키고자 하는 양면성을 가졌다. 가령 자신을 좋아해 주는 선생님의 진리 같은 이야기는 지루해하고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지만, 예수의 제자들이 싫다고 했지만, 성에 대해서는 매우 보수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경계에 서있는 사람으로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얼마 전 읽었던 카뮈의 <이방인>, <시지프 신화>가 생각났다. 홀든은 카뮈를 비롯한 실존주의 철학자와 작가가 이야기하는 부조리를 어렴풋이 인지하고 알아가지만 어디까지가 부조리인지 어떻게 넘어설지에 대해서는 아직 생각이 정립되지 않은 미숙한 청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숙한 청년. 그렇다면 나는 좀 다른가? 나는 그 아이보다 두 배는, 아니 그보다 더 나이 들었으니 더 성숙한 사람일까?
아니다. 나는 현재 인생의 안식년이 생각보다 길어지면서 미래에 대한 불안과 기대가 동시에 불어닥친 상황이다. 때늦은 사춘기를 겪고 있으니 홀든의 방황이 그저 남의 것이라고, 소설 이야기일 뿐이라고 멀리 떨어져 봐지지 않았다. 그러니 나 또한 미숙한 존재인 거다. 그와 함께 뉴욕의 공원을 헤매고 박물관 앞에서 서성였으며 어린아이의 천진함을 지켜주고 싶은지도 모른다. 호밀밭에서 뛰어놀다 낭떠러지에 아이가 떨어지려고 하면 단번에 나타나 잡아주는 파수꾼이 되고 싶지만 그 방법을 모르는지도 모른다.
철없이 방황하던 홀든은 여동생 피비의 간곡한 부탁으로 결국 집으로 돌아온다. 그가 지켜주고 싶던 아이가 도리어 그를 지켜준 셈이 되었다. 과정이야 어찌 됐든 그는 안톨리니 선생님이 말하는 성숙한 사람이 되는 과정에 한발 디딘 셈이다. (p.282 미성숙한 사람의 표시는 대의를 위해 고상하게 죽고 싶어 하는 것인 반면, 성숙한 사람의 표시는 대의를 위해 겸허하게 살고 싶어 한다는 거다) 돌아온 그는 정신분석가가 학교에 돌아가면 노력할 거냐고 묻는 질문에 '해보기도 전에 어떻게 할 건지 어떻게 아느냐는 거다. 답. 모른다. 내 생각에는 노력할 것 같지만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라고 한다. 그건 정말 홀든이라는 캐릭터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정답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이후를 이렇게 기대한다. 홀든은 인간 행동에 혼란을 느끼고 겁을 먹고 역겨워하는 게 나 혼자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나아가 학문적 교육으로 정신의 크기를 알게 되고, 그에 따라 정신에 옷을 입히게 될 것이라는 것도.
홀든으로 대표되는 청년도 그리고 그 청년의 고민을 다시 시작하는 나도 아무튼 모순 덩어리다. 하지만 그 안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부조리를 인지하고 방황하고 결국은 겸허하게 살아가기를 결심하겠지. 이왕이면 그게 호밀밭의 파수꾼이면 더 좋겠다. 그런 어른이 된다면 설사 순수를 잃는다고 해도, 그 순수를 지키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보람을 만들 수 있겠지. 보람이라는 게 살아가는데 많이 중요하다면 꽤나 멋진 나의 두 번째 인생을 열어볼 수 있겠지. 막연하지만 그런 상상과 기대를 홀든에게 더해보았다. 아마 그래서 후반에 입이 거친 이 소년을 애정 어리게 쳐다보게 된 것 같다. 잠든 그의 모습을 바라보고 머리를 쓰다듬던 안톨리니 선생님처럼 말이다.
<100자 평>
방황하는 철없는 소년에게서 어느 순간 나의 모순과 고민을 발견한다. 나는 과연 괜찮은 어른인가. 순수함을 간직한 호밀밭의 파수꾼이 될 수 있는가. 어느새 뉴욕밤거리를 쏘다니던 홀든처럼 실컷 방황하고 돌아오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