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이와 깊이를 고려한 책 고르기
급한 분들을 위한 요점 정리.
책을 고를 때 교양의 넓이과 깊이를 고려해서 분야별로 몇 권의 책을 한꺼번에 읽으며 비교해 보는 독서법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장정일의 공부는 그 내용적인 면에서도 많은 생각할거리를 던져주었지만, 그가 취하고 있는 독서법 역시 내게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주었다.
내가 지금까지 읽어온 약 30여권의 책들은 아무리 봐도 그 목록에서 통일성이나 일관성을 발견할 수가 없다. 그저 그 상황에서 눈에 보이는 책을 고르고 닥치는대로 읽어나갔다고 볼 수 밖에 없는 목록이다. 그래서 어쭙지 않은 자기 개발 관련 도서에서부터 신앙 서적, 그리고 소설, 시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책들이 섞여 있다.
그러나 최소한 장정일은 그렇게 책을 읽는 것 같지 않다.
글을 쓰기 위해서 책을 읽어서일수도 있지만, 그는 동일한 주제 혹은 유사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몇 권의 책을 동시에 읽어내는 식의 독서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독서의 장점은 그가 적고 있는 독후감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동일한 주제에 대한 여러 상이한 시각을 통시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공부에 대한 정의와 일통하는 것인데, 민주주의가 의견와 의견의 부딪힘이고, 그런 의견의 교환을 통해 서로의 다름을 인지하고 배워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독서법을 통해 진정한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 방법이 무슨 거창한 방법은 아니다. 내가 연구를 할 때에도 어떤 종류의 일을 하게 되면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연구 주제와 관련된 연구 논문들을 모으고, 그 논문들을 읽고 정리하면서 주제에 대한 배경을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않으면 내가 하고자 하는 연구의 가치와 특수성을 제대로 정의할 수 없기 때문에 분명 연구 과정에서 후회를 하게 된다. 말하자면, 나는 내가 전공하고 있는 연구 분야에서는 항상 이런 공부 방법을 적용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전공 분야의 연구가 아닌 교양을 위한 책읽기에서는 이런 방법을 적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내 기본적인 책읽기의 넓이가 너무 좁기 때문에, 집중적으로 깊게 읽기 위해서 필요한 기본적인 넓이조차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최소한 어느 정도의 기본은 있어야 한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대학생이 읽어야 할 교양도서 100선> 따위의 추천 목록에 있는 책 중에서 절반도 읽어내지 못한 내 상황에서는 넓게 읽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다.
박사라는 것은 박학다식한 선비라는 뜻일진대 배움의 넓이가 넓은 사람이라는 뜻과는 달리 지금의 나는 매우 한정된 분야에서 조금 알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그런데, 책읽기에 있어서 (혹은 교양에 있어서) 충분한 정도의 넓이라는 것은 참 정의하기 어려운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같이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종합적인 인간형을 추구하는 것은 지금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볼 수 있고, 어떤 면에서는 내가 일하고 있는 좁은 분야에서 충분히 깊게 읽는 것도 너무나 어려울 정도로 많은 정보들이 넘쳐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나 넓이와 깊이는 어느 정도 타협을 할 수 밖에 없다.
만약, 장정일의 책읽기 전략을 따라서 한 주제에 관해 최소한 서너권의 책을 한꺼번에 읽는 방법을 쓴다고 하면 어떤 주제부터 시작을 해야 하는걸까? 나와 같은 자연과학 전공자들이 항상 인문학자들을 향해 가지고 있는 일종의 컴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푸코, 데리다 같은 사회학자들에 대해 읽어야 하는걸까? 아니면 정치? 혹은 경제에 대한 책을 읽어야 할까?
결국 어떻게 읽느냐의 문제는 무엇을 읽느냐의 문제에 종속적일 수 밖에 없다. 한 때, <역사적 예수>라는 주제에 심취해서 역사적 예수 연구에 관한 책들을 구할 수 있는대로 구해서 읽었던 때가 있다. 이 때의 책읽기는 엔도 슈사꾸의 예수의 생애라는 책을 읽고 나서 그 영향으로 시작이 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어떤 책을 통해 깊은 인상을 받았거나 충격을 받은 경우에는 자연스럽게 그와 관련된 책읽기를 깊이있게 하게 되는 것 같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지금까지 읽었던 책들이 <예수의 생애>만큼 내게 충격적이고 인상적이었던 것이 없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한 때 움베르트 에코의 ‘푸코의 추’를 읽고 에코의 글쓰기에 깊은 인상을 받은 적이 있다. 그래서 그 이후로 나온 그의 장편소설들을 (바우돌리노까지) 다 구입을 해서 읽었다. 그의 책들을 읽으면서 어느 것 하나 내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는 못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엄청난 배경 지식을 바탕으로 지적 유희를 즐기는 그의 소설이 나름대로 지식에 대한 내 갈증을 자극하는 것을 즐기면서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편으로는 이탈리아 사람인 에코가 중세 유럽의 역사에 해박하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당연한 것이고, 내가 중세 유럽의 역사를 모르는 것에 대해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반면에 내가 한국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부끄러워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도 된다. 그래서 이번에 책을 구입하면서 집어넣은 책이 다산 정약용에 대한 책이었다. 그보다 더 위로 올라가는 것도 가능해지면 좋겠지만.
주저리주저리 쓰다보니 초점이 없는 글이 된 것 같지만, 최소한 내가 2007년 초부터 지금까지 해온 책읽기의 방식이 너무나 중구난방 일관성이 없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반성해 보고, 앞으로는 교양의 넓이와 깊이에 대한 나름대로의 연구와 생각에 의해 독서 목록을 정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 결론이다.
2007년 5월 30일 https://lordmiss.com/journal/archives/1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