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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하 Mar 21. 2023

당신의 리즈는 언제인가요?

햇살처럼 남은 당신에게

'한때는 나도 팬클럽이 있었다고.'


회원수가 아마 15명이었을 것이다. 인생에 리즈시절이 언제냐는 질문에 난 연기를 하던 시절을 꼽으며 회원수는 언급하지 않고 그렇게 으스대고는 했다.


리즈시절에도 번뇌는 있는 법. 하루는 연기가 맘에 안 들어 기분이 안 좋았다. 그날따라 집중이 흩어져 감정이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스스로 느껴졌나 보다. 배우들은 이런 날에 습관적으로 똥배우라며 자신에게 쌍욕을 날리고는 하는데, 나 역시 똥 씹은 표정으로 나 자신을 경멸하고 있었다.

그렇게 공연이 끝나고 대기실로 돌아와 시무룩하게 분장을 지우며 이따 동료들이랑 회식이나 해야지. 술이나 마시면서 내 연기를 잘근잘근 씹어줘야지. 하고 맘속으로 자학을 예약하고 있었는데, 스텝으로부터 한 관객이 나를 찾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응? 나도 모르게 지인이 왔나? 아님 지나가던 동료 배우가 왔나? 안 돼. 그것만은 안 된다. 나 오늘 완전 망쳤는데. 나 원래 이거보단 연기 잘한다고!! 전혀 재밌게 보지 않았는데 애써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고 동료를 격려해 주는 일은 나도 배우로서 많이 겪어오고 행해온 일이다. 배우에게 이것처럼 비참한 일은 없다.


하.. 대체 누구지. 이따 회식 때 술 좀 마시겠구나. 터덜터덜 가기 싫은 발걸음을 억지로 이끌고 극장 밖으로 나오자, 전혀 모르는 한 여자분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미소를 머금은 그녀는 어리둥절한 나에게 꾸벅 인사하더니 말했다. 고맙다고. 덕분에 오랜만에 실컷 웃다가 간다고. 


'너무 웃어서 엄마한테 미안했어요. 얼마 전에 엄마가 돌아가셨는데 내가 이렇게 웃어도 되나.'


갑자기 훅 들어온 그녀의 말에 마땅한 대답을 전혀 고르지 못하고 허둥대는데,


'근데, 딸이 계속 우울하게 울고만 있는 것도 엄마가 바라는 건 아닐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인사하고 싶어서 왔어요. 고맙습니다. 오랜만에 실컷 웃다가 가요.'


난 오랫동안 멍하니 서서 바라만 봤다. 잔잔하게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그날, 회식자리에서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동료들 앞에서 나의 연기를 잘근잘근 씹어대며 자학을 예약해 두었던 나의 입술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내 연기를 보고 오랜만에 실컷 웃었던 그녀를 나의 섣부름이 모독하는 일이 없기를. 나의 침묵은 말없이 술잔만 비웠다. 


공연이 끝나고 밤이었는데 그녀의 뒷모습은 햇살처럼 나에게 남았다. 나의 기억은 그렇게 윤색되었나 보다. 배우로서 성공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삶이었지만 햇살 같던 그녀를 떠올리며 난 나의 리즈를 기억한다.






제 글을 읽고 한 순간이라도 기분이 좋았던 사람들이 모독당하지 않게 

전 저의 두 번째 리즈를 열심히 닦고 또 닦고 있습니다. 

그날의 당신이 나를 응원해 줬듯, 

오늘의 나도 당신의 삶에 눈부신 리즈가 자주 방문하기를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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