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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획자 김로린 Sep 26. 2022

내가 영감을 받은 사람들

사람은 환경의 동물이니까


이 말을 언제나 가슴 속에서 기억하며 살아왔다. 그래서인지 나는 늘 새로운 환경과 도전적인 환경을 찾으며 살아왔던 것 같다.


그리고 30년 + a년수로 산 지금은 어쩌면 지금의 나라는 사람의 결과는 내가 선택적으로, 또는 운명적으로 만났던 주변의 사람들을 통해서 내가 지금까지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20대까지 나에게 영감을 주었던 사람들


가장 가까이서 나에게 영감을 주었던 사람들은 아무래도 가족들이었다. 나는 태어날 때 주변에는 '장사 하는 사장'들이 내 가족이고 주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아주 가까이서 내게 영향을 주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부터 내가 '사장'이 되고 싶은 마음, '내 일'을 하고 싶어하는 모든 사고와도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조부모님, 삼촌, 이모, 부모님까지 내 주변 어른들은 전문직이나 공무원 일보다는 자영업자가 많았다. 수십 년간 작은 옷가게를 운영했던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언제나 동네에서 제일 인기있는 가게의 사장이었던 우리 엄마, 그리고 엄마가 싫어했지만 결국 자기 사업했던 우리 아빠, 그리고 삼촌들. 이모들도 다 자기 사업, 자기 가게를 하며 살았다.


30대 이후 지금도 나에게 영감을 주는 사람들


특별하게 외가에는 말 많고, 똑부러지고, 자기 주장 강한 엄마, 이모들이 많았다. 삼촌들 기강 다 잡는 엄마는아이러니하게 언제나 나에게 "너무 나서면 남자들이 안 좋아하고, 남자 앞에서는 다소곳하고  여성스러워야해" 라고 잔소리하곤 했다.


그런 엄마와 이모들의 모습은 때론 혼란스러웠지만, 자기 가정은 어떻게든 먹여살린다는 태도 하나는 나에게도 유전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10년간 혼자였지만 누구보다 가장 강했던 사람


우리 엄마에 대해서 더 이야기 하자면, 우리 엄마의 20대는 철없던 '공주'였다고 한다. 엄마는 어린 시절 가족들 중 혼자서 꽃무늬 꼬까신을 선물 받고 신고 다녔다고 자랑했다. 그리고 그 철부지 '공주'와 결혼한 아빠는 결국 고생을 많이 하셨다.


그렇지만 내 기억 속 40대의 우리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었다. 장사 빚 때문에 집안이 풍비박살 났던 상황에 결국 두 딸 먹여살리느라 고생했던 사람이었으니까.


절박한 상황에서 엄마는 어떻게 우리를 먹여살렸을까 그런 생각을 종종 하곤 한다. 제대로된 대학 졸업장도 없는 엄마는 내 기억으로는 찜질방이니 친구 가게니 일식집이니, 여기저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셨던 것 같다.


그렇게 10년을 엄마는 혼자서 가정을 책임졌다. 지금의 엄마는 언제나 나에게 가장 강력한 사람이다.


내 인생에 가장 모험적이었던 사람


우리 이모 이야기를 하자면, 내 두번째 엄마 같은 '이모'다. 아주 어린 시절 소아마비를 겪고 이후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지만, 언제나 책과 음악, 그림을 좋아하며, 50대가 되어도 용기 있게 휠체어 타고 혼자 서울 여행을 하는 사람. 그게 우리 이모다. 우리 이모는 지금도 빨간머리앤 같이 소녀 같은 사람이다.


어린 시절 엄마가 장사를 했기에 나와 동생은 이모의 손에 많이 길러졌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취미나 음악, 그림을 좋아하는 면들은 모두 이모의 모습을 많이 닮게 되었다.


우리 이모는 늘 당당했다. 예전에 이모 휠체어를 밀어주면서 동네 산책을 하고 있었는데 어떤 아이가 "엄마, 저 사람봐. 다리 아픈거봐. 저거 타는거 뭐야?" 라고 했었는데 나는 기분이 나빠도 아무말도 못했다.


버르장머리 없다고 소리치고 싶었던 순간이었지만 우리 이모는 '응 꼬마야. 이거는 휠체어라는 건데, 이모는 다리가 아파서 이렇게 타거든? 아픈거 아니고 지금은 괜찮아~' 라고 했던 그 당당함에 나는 놀랬었다. 혹시라도 아이가 놀랄까봐 배려하면서도 자상하게 설명해주던 모습은 지금도 기억이 난다.


이모는 50대까지 한번도 사회생활을 한 적이 없었다. 유일한 사회생활은 '종교'였다. 교회에서 만나는 사람들 정도가 친구이자 세계였던 이모였지만, 커뮤니티 속에서도 분위기를 주도하고 이끌어나가는 친화력으로 인기가 많았던 것 같다.


하지만 늘 외로움이 있었고, 불안 증세도 있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환하게 웃는 소녀 같은 사람이었지만 속에는 늘 세상을 알고 싶지만 장애 때문에 알 수 없어 답답함과 분노, 스트레스가 있었던 것 같다.


50대에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


그러던 이모가 작년에 전화가 왔다. '나 취업했어!' 전화 통화에서 느껴지는 감격, 행복, 기쁨이 느껴졌다. 정부에서 장애인을 대상으로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잘 졸업하면 쿠팡에 취업까지 시켜준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긴가민가 했다. 심지어 교육장이 차로 1~2시간을 가야하는 거리인데, 체력적으로 무리가 되지는 않을까 걱정했었다. 그냥 교육만이라도 잘 졸업하면 좋겠다, 취업 안되서 속상해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비바람이 와도, 무슨 일이 있어도 이모는 몇 개월의 고객센터 교육을 이수했고, 그리고 쿠팡 고객 센터에도 취업을 하더라. 소름이 쫙 끼쳤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이모의 의지와 열정이 더 크다는 걸 알게 되었다.


쿠팡의 근무는 컴퓨터만 있으면, 집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었고 다행히 이모는 센스와 친화력으로 상담 업무를 잘 수행했다. 심지어 교육 과정에서도 에이스로 인정받았다고 하고 교육생들과도 친해져서 친구들도 많이 생겼다고 했다. 통화할때마다 느껴지는 기쁨과 설렘, 즐거움이 가득찬 이모의 목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뭉클하기도 했다.


현실의 벽에도 좌절하지 않을 용기


하지만, 대부분의 대기업이 그렇듯이. 기업은 사익을 추구한다. 좋은 취지의 프로그램이었고 훌륭한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사업이었지만 1년이라는 계약직은 정규직 전환까지 보장해 주지 않았다.


놀라운 건 이모는 그럼에도 슬퍼하지 않았다. 인생의 수많은 어려움과 실패, 좌절을 경험했기에 이모는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고 했었다. 기업이 1년이 넘으면 퇴직금을 줘야하는 것이고, 정규직 전환이 되는 교육생이 거의 없다는 현실을 설명했고 이해가 되기 때문에 기대하지 않는다고 했다.


정말 절망스러운 이야기였고, 나는 어떠한 위로도 하지 못했다. 마음이 슬프고 화나지만 대놓고 표현하지는 못했다. 그냥 이모의 이야기만 들을 뿐이었다.


새로운 도전과 한 줄의 이력


얼마전 이모에게 전화가 왔다. 새로운 교육을 듣기로 했다고 했다. 이번에는 엑셀이라고 했다. 본인은 초등학교 졸업도 안했고, 덧셈 뺄셈도 잘 모르고 영어 알파벳도 몰라서 함수 치는 것도 너무 어렵지만 몇 번이라도 도전하다보면 결국 따는 날이 오지 않겠냐고 이야기 했다.


함수 배우는게 너무 어려워. 츄스(Choose)? 츄즈? 그거 있잖아. 영어도 잘 모르니까. 수학도 모르고. 그래도 재밌어. 학원 졸업하고 나서도 계속 하다보면 언젠가 자격증도 따지 않을까? 탈락해도 다시 하면 되는 거니까 그래서 너무 신나네~

쿠팡에서 떨어진건 아쉽지만, 재밌는거는 그때 1년 고생했다고 이제 지원할 회사가 더 많더라? 신기하지. 이제 이모도 1년 경력이야. 경력. 신입 아니고 경력!!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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