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획자 김로린 Jan 17. 2022

서울 살이 시작, 스타트업 입성기

고시텔, 반지하를 거쳐 생존했던 지난 5년간의 이야기

모두가 개발자가 될 때, 딴짓하던 시절


2016년, 지방대 IT대학의 졸업을 눈앞에 둔 저는 앞이 캄캄했었습니다. 한 학기만 남기고 졸업은 해야 하는데 졸업이 다가왔지만, 졸업 후 진로 방향을 전혀 잡지 못했었거든요.


지금이야 말하지만, 저는 개발자로의 재능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개발도 못했고요. 자료구조와 배우고 시험을 쳐야 하는데, 여기에 쓰는 함수 하나가 왜 이렇게 되는 거지? 를 몇 시간씩 붙잡고 있었던 저에게는 외우고 쳐야 하는 시험은 정말 장벽이었습니다.


6년의 대학 시절 동안 제가 제 스스로 발견한 점이 있다면, 개발자 말고는 다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이었거든요. 가장 재밌었던 수업은 이 알고리즘이 세상에 어떤 변화를 줄 수 있는지 설명해주는 수업과 소프트웨어 설계 팀 프로젝트이었습니다. 디자인이 필요하면 디자인을 하고, 발표자가 필요하면 최선을 다해 발표를 준비했던 추억이 있습니다.


철없고 그저 낙관적인 소리로 들리겠지만, 저는 그냥 어딘가에는 제가 필요한 곳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0대 후반까지 살아오면서, 어디 가서 게으르거나 인성 나쁘다는 소리 들은 적 없었고요. 과외나 아르바이트를 하더라도 선생님 일 못 한다는 이야기는 듣지는 않아서인지 다행히 자신감은 잃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학업보다는 일에 대한 욕심이 더 많았고, 뭐든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당시의 저는 일에 대해서 미래에 대해서 상상력이 너무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서울에는 워낙 다양한 사람들이 많지만, 지방인의 설움이랄까요. 주변에는 '이런 길도 있어'라고 보여주는 롤모델이나 선배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도 어딘가에서는 내가 필요할 것이라는 한 줄기 희망으로 열심히 일을 찾으러 다녔습니다. 과외비를 벌면 주말에는 서울까지 왔다 갔다 하며 온갖 교육이란 교육을 많이 받으러 다녔습니다.


2013년, 당시 아무것도 모르고 열심히 들었던 창업 아카데미


지푸라기라도 잡아보자는 마음으로 도전했던 시절이었지만, 그러면서 서울에서 새로운 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이렇게도 살 수 있고 저렇게도 살 수 있구나.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사람 공부를 할 수 있었던 소중한 시절이었습니다.


현업 직장인, 인생 선배, 또래임에도 벌써 자기 회사가 있는 창업가들까지. 서울에는 참 다양한 사람이 많다고도 느꼈습니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딱 제가 창업을 할지, 취업을 할지 정하기가 애매한 상황이었습니다.


운명처럼 스타트업에 입사하다


그러던 와중 어느 날 우연히 학창 시절 친구를 통해서 스타트업 하나를 소개받게 되었습니다.


재밌는 점은 약 10년 동안 서로 소식도 몰랐던 학창 시절 친구였는데, 오랜만에 페이스북으로 연락이 닿아 알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그 친구는 이미 저보다 1년 빠르게 서울에서 일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스타트업에서 일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 친구의 소개를 통해서 제 첫 직장을 알게 되었습니다. 개발자 교육을 만드는 일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물어보더라고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쩌면 그 회사는 저 같은 사람을 쓰고 싶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슨 자신감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직감적으로 여기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컴퓨터 공학을 잘 살려서 할 수 있는 기획자로의 일이었고, 신입도 뽑는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지원했습니다. 인터뷰 과정에서는 불안하기는 했지만, 결국 합격을 하고 첫 직장을 위해 그렇게 2017년 여름,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고시텔에서 시작한 첫 직장생활


당시 저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지만,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뻤습니다. 한 달 바짝 단기 아르바이트를 해서 달랑 200만 원을 초기 자본으로 들고 서울 강남에 고시텔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여자 애가 무슨 허름한 고시텔 생활이냐는 말을 하며 어머니가 참 그때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그리고 서울 가서 살 수 있겠니, 1년 안에 제가 울면서 짐 싸고 내려올 것이라며 성급하게 결정한 저에게 잔소리를 하셨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걱정은 이해가 되었지만, 스스로 결과로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정말 힘들면 2-3개월만 있다가 내려오겠다고 하고 고시텔 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저는 참 겁도 없고 무서울 것이 없었네요. 세상 물정도 모르고 서울로 올라와 고시원을 덜컥 들어가고, 그래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사실과 한 명의 친구는 있다는 사실에 너무 감사했어요.


옛날이야기하니까 재밌는데, 사실 그렇다고 정말 아주아주 저렴한 고시텔을 가지는 않았고요. 나름 고시텔 중에서도 깔끔하고 비싼 고시원 생활을 하기는 했습니다. 보증금 없이 월세가 50 원인 곳이었고요. 보증금 0원에  달만 살아도 되고, 중간에 며칠  살다가 나가도 일할 계산이 된다고 하더라고요.  방은  몸뚱이를 늬울  있는 아담한 싱글 침대에 작은 옷장, 코딱지만  브라운관 TV, 손도 넣기 어려운 작은 창문, 삐걱거리는 옷장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이었던 점은, 그 방안에도 샤워실이 있었습니다. 정말 농담이 아니고 문을 열고 들어가서 서면 끝인 공간이었고요. 서있던 자리에서 그냥 앉으면 변기가 엉덩이에 닿는 공간이었습니다. 때로는 너무 좁아서 변기 위에 뚜껑을 덮고 앉아서 샤워를 한 적도 많았고요.


고시텔에서 반지하 원룸으로


시간은 참 빨리 지나갔습니다. 1년은 금방이었어요. 사실 서울살이에 적응하고 회사 일을 배우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강남에서 일을 한다는 점에서도 어깨가 으쓱했던 지방러였어요.


주변에 사회 초년생 친구들을 알아가다 보니, 저와 같은 분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서울 집값이 워낙 비싸니, 다들 고시텔이나 반지하 원룸에서 많이 사시더라고요. 서울에서는 사회 초년생의 상황이 쉽지는 않다는 걸 몸소 체감하게 되었습니다.


최저 임금 조금 넘는 인턴 월급이었지만, 1년 후에는 보증금 백만 원을 갖고 반지하 원룸으로 이사했습니다. 고시텔을 떠나게 되었지만, 다음 보스몹은 반지하의 곰팡이였습니다. 끔찍한 곰팡이가 늘 제 머리 위에 득실거렸고, 매일 방 안에서 숨 쉴 때마다 병에 걸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반지하 탈출, 무모하게 살아보기


반지하에서 도저히 못 살겠다는 생각이 들어 한번은 단기 방이라는 곳에 입성하게 되었습니다. 보증금과 월세가 1:1 비율인 원룸이었는데, 월세가 최소 70만 원 이상인 방들이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것이 풀 옵션이었고, 정말 넓은 킹사이즈 침대에, 드럼세탁기에 모든 것이 다 있는 훌륭한 방이었습니다.


무서울 게 없었던 그 시절에 저는 반지하를 벗어나서 어떤 방식으로든 고생하는 스스로에게 보상하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정말 지하에서 지상으로 오니, 세상이 달라 보이더라고요. 물론, 인턴 월급으로는 너무 비싼 집이었기 때문에 2-3개월만 살다가 원룸으로 이사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10년 된 구축 투룸 빌라를 만나다.


그리고 지금 저는 신사, 신논현, 논현, 언주 역을 거쳐 관악에 입성했습니다. 사회 초년생들이 가장 많이 사는 동네가 바로 관악 아니겠어요. 그리고 지금은 운명적으로 리모델링 되어 좋은 컨디션의 투룸 빌라를 만나서 2년 넘게 살고 있습니다.


지금의 저는 어엿한 직장인으로 서울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5 , 고시텔에서 시작했던 일들, 반지하에서 곰팡이들과 함께 숨쉬었던 일들도 이제는 모두 추억의  조각이구요. 연봉이 오르고,  집도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가고, 방도  칸에서  칸이 되고, 그리고 같이 사는 사람도 늘었습니다. (+고양이  마리가 습니다.)


완벽한 자립의 날이 올때까지


직장인 5년차, 저는 지금도 완벽한 자립의 날을 꿈꾸고 있습니다. 아직 저는 집도, 차도 없이 언젠가는 또 새로운 거주지를 찾으러 움직여야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동안은 서울에 올라와 살아가는게 중요했다면, 이제는 서울에 끝까지 살아남아 자립할 수 있는 시기를 꿈꾸고 있습니다. 월급과 저축으로는 이 서울에서 살아남기는 어려울 것 같구요. 5년 안에는, 오롯히 완벽하게 혼자의 힘으로 서울에서 살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래봅니다.


그리고 그 날을 준비하기 위해 저는 로린 킴의 사이드 허슬 실험실을 만들었습니다.


월급과 저축을 벗어나, 조금 더 과감하고 용기있게 자립 실험을 해나가는 저만의 실험실,

앞으로도 더 다양한 이야기들을 꺼내볼 예정이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로린 킴의 사이드허슬 실험실  




로린 킴

창업가의 꿈을 실현시키는 / 서비스 기획자

나다운 일을 찾는 리모트워커

외주 협업 문의 환영

(loreen@selectway.co)


#피티부스터와 #셀렉트웨이 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영감을 받은 사람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