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이일수록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출국 전부터 마음이 졸이고 이따금씩 눈물이 났다. 아이가 손꼽아 기다리던 여름방학이 가까이 다가왔지만, 나는 아이가 곧 출국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초등학교에서 맞이하는 다섯 번째 방학이다. 매 방학마다 아이는 아이 나름대로 무얼 하며 보낼지 행복한 고민에 빠지는데, 부모는 부모 나름대로 고민이 많다. 충분히 만족해할 시간을 만들어 주고 싶지만, 맞벌이 부모로서 아이 방학일 수만큼 휴가를 쓸 수 없으니, 방학 계획을 세우는 것이 정말 큰 프로젝트다.
아이는 이번 여름방학에 4시간 비행 거리의 해외 이모네 집에 가기로 했다. (이모와 이모부의 수고로움과 헌신이 필요한 일인데도) 국제학교에 다니는 조카들의 긴 여름방학에 맞춰 우리 아이를 함께 돌봐 주겠다는 초대를 받았다. 돌봄이나 학원을 전전할 방학 동안 타지에서 충분한 쉼과 체험을 채울 수 있을 거라 기대감에 아이를 보내기로 했다. 여름방학 기간을 산정해 보니, 아이는 거의 4주의 시간을 해외에서 보내게 된다.
아이는 UM (Unaccompanied Minor) 서비스를 이용해 스튜어디스와 비행 여정을 동행한다. 현지 이모를 만나는 과정까지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챙겨주기 때문에 안심이 된다. 성인 기본 비행 티켓에 항공사마다 제시한 UM비용을 추가 결제하면 된다. 아이 말에 따르면 총 4번 정도 비행 과정에 다른 스튜어디스 이모들을 만났다고 한다. 인천 공항에서 인솔하는 스튜어디스 1명, 비행기 탑승하고 2명의 스튜어디스 돌봄을 받았고, 현지 공항에서 외국인 스튜어디스 1명을 따라가 이모를 만났다고 한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 아이는 무사히 방학을 보내고 돌아왔다. 다음날 개학했고 다시 여느 때처럼 일상을 보내는 중이다. 나때에 비하면 한참 어린 나이에 더 큰 세상을 경험한 아이를 보니, 이 경험이 훗날 어떤 자양분이 되어 나타날까 궁금하다.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에 여러 경험은 본인만의 독창적인 안목을 갖게 할 것이다. 최근 조승연 작가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성장기를 살짝 공유해 주셨는데, 어린 나이에게 미국으로 건너가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어쩌면 한국에서 그대로 자랐다면 몰랐을 '이방인'(객관적인) 관점을 갖고 한국과 한국인들을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분의 타고난 탁월한 기질이 발휘되었겠지만, 성장기의 경험은 무시하지 못할 큰 영향 요인이다.
가족과 떨어져 해외에서 보낸 한달의 시간이 아이에게 준 긍정적인 변화들이 있다면...
1. 여유로워졌다. 동생을 바라보는 것도 예전처럼 짜증과 예민함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소중함을 깨달은 듯하다. 뭔가 다 큰 어른처럼 동생의 농담에 웃어주는 걸 보면, 마음의 여백이 넓어진 것을 느낀다.
2. 애정표현이 많아졌다. 동생을 소중히 여기듯, 본인에게 비워진 애정지수도 충분히 채우려는 마음이 생긴 것 같다. 이모와 이모부의 각별한 케어를 받았지만, 스킨십이 부족했을 수도 있었겠다. 그래서 수시로 엄마에게 뽀뽀와 허그를 원하고 있다. ** 총량의 법칙이 스킨십이나 애정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걸 느낀다.
3. 이야기 꾼이 되었다. 아이는 특별한 상황에서 다양한 경험을 많이 하게 되었다. 토트넘 계약 기간 끝자락에 있던 손흥민 경기를 직관하고 그의 사인을 받았는가 하면, 디즈니랜드에서 무서운 놀이기구를 마스터했고, 더운 여름 휴가로 떠난 마카오에서 유스풀을 물개처럼 몇 바퀴를 탔다. 국가대표 출신의 축구클럽에 다니면서 코칭받기도 했다. 이 모든 에피소드들이 언제든 만담처럼 흘러나오게 되었다. 격양된 목소리와 즐거운 표정으로 말이다.
4. 적당한 거리감이 느껴진다. 아이와 떨어진 시간만큼 다시 만날 때는 더 애틋해지고 더 반가웠지만, 그새 약간의 어색함이 자리 잡았다. 마치 나무의 지울 수 없는 나이테처럼 말이다. 열 살이 될 때까지 아이와 그렇게 2번(작년 여름 포함) 떨어져 보니, 그 경험은 아이를 충분히 독립적인 존재로 바라볼 계기가 되었다. 아이 입장에서도 스스로를 그렇게 느끼게 만들었다. 다시 말하면 한 뼘 더 자란 것이다.
5. 스스로를 잘 챙기는 아이가 되었다. 자기의 짐을 관리하면서 타인의 공간에서 지내고 돌아왔다는 것은, 옷을 개고 정리하고, 양치와 샤워를 하고, 학습량을 꾸준히 해왔다는 것이다. 아이는 스스로를 챙기고, 해야 할 일에 대해 적당한 동기부여가 되어있었다. 이모와 조카들의 학습 루틴에 맞춰서 미루지 않는 습관이 훈련이 되어온 듯했다.
이 글을 쓰면서 언젠가는 나도 아이와 함께 해외에서 머물 기회가 생기면 좋겠다. 삶을 살다 보니 어떤 기회가 생길지 모르니 즐거운 기대감으로 기회를 물색해 봐야겠다.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양질의 경험이 쌓여 잘 성장해 나갔으면. 좋은 잠이 쌓여 나를 만든다는 말처럼, 좋은 경험이 쌓여 더 나은 우리를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