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누가 코로나에 걸렸다

좋았던 일이 없었던 한 해는 마지막까지 지독하게 완벽했다

by 리휜








“올해는 좋았던 일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아. 내내 안 좋은 소식만 들었어.”


저녁식사를 하던 남편이 그렇게 말하며 얼른 새해가 밝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해가 지나가면 조금은 나아질 것만 같다면서.

에이, 꼭 그렇기만 했겠어? 대꾸하려다가 곰곰이 생각을 되씹게 되었다.

그러게. 1년을 돌이켜 보니 좋았던 기억은 선뜻 떠오르지 않고 쳇바퀴를 돌았다.




아이는 올해에만 세 번을 입원했다. 1월에는 RS바이러스로, 돌이 조금 지난 5월에는 원인을 모를 미열 때문에 며칠 간격을 두고 두 번이나. 어른들께선 아이들은 다 열나고 아프면서 크는 거라고 말했지만 대역병의 시대를 겪는 초보 엄마는 무섭고 겁이 났다. 엑스레이에도 혈액검사에도, 소변검사와 바이러스 검사에도 이상이 없는데 아이는 내내 37.6도에서 38도를 오가며 뜨끈한 열기를 내뿜었다. 차라리 크게 열이 난다면 의심해볼 수 있는 병증도, 시도해 볼 수 있는 검사들도 많았지만 어중간한 열 뿐인 증상으로는 그 어떤 시도도 해보기 힘들었다. 그 와중에 미열은 잘 잡히지도 않았고, 마지막 입원은 지지부진한 상태로 일주일을 넘게 이어졌다.


입원이 일주일을 넘기던 날은 도저히 불안함을 버티지 못하고 지금이라도 대학병원을 가야 하나 했지만 아이의 증상은 다른 것도 아닌 열이다. 병원에 미리 전화를 해 보니 열이 있는 환아는 외래 접수 자체가 안된다고 했다. 다른 증상이 전혀 없고 고열이 아닌 미열이라고 설명했지만, 병원 측은 완강했고 나는 병원의 결벽을 이해해야만 했다. 길어지는 입원과 변함없는 아이의 상태에 남편의 병원에 대한 신뢰도는 바닥을 쳤다. 더 이상은 이 병원을 믿을 수 없다고 당장 병원을 옮기자고 했지만, 나는 돌이 겨우 지난(그것도 열까지 나는) 아이를 데리고 수없이 많은 예비 확진자들이 들락거릴 선별 진료소를 방문하는 모험을 할 자신이 없었다.


입원 열흘 째 되던 날, 아이의 열은 겨우 정상으로 돌아왔고 별일 없이 퇴원했다. 그 이후의 외래에서도 아이는 매번 37도를 넘기는 체온을 보였고 결국 아이의 기초 체온이 조금 높은 편인 것으로 정리됐다. (이 상태는 아직도 지속 중이다... 놀랍게도... ) 열흘의 입원이 무색할 만큼 쉽게 끝나버린 해프닝이었지만, 아이의 길었던 입원 내내 나는 식사도 잠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고 아이의 퇴원 후 며칠을 앓아누워야만 했다. 독하디 독한 돌치레였다.




우리는 아이의 첫돌잔치를 못했다. 올해 3월을 오매불망 기다렸던 우리를 실망시킨 것도 코로나였다.


돌잔치를 준비하는 일은 뷔페를 알아볼 때부터 순탄치 않았다. 집 근처의 뷔페는 손님에게 대접하기 끔찍할 수준의 식사를 내놓는 곳뿐이라 이동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찾아오기 편하고, 그나마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내놓는 곳으로 정했다. 11월에 예약을 했는데 1월에 놀라운 내용의 문자가 왔다. 부채를 이기지 못한 뷔페가 기어이 법원의 강제집행을 당하는 바람에 영업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걸어둔 예약금조차 돌려받지 못했다. 억울함보다는 당장 눈앞에 닥친 두 달 뒤의 돌잔치가 문제였다. 밤잠을 설치며 인터넷을 뒤지고, 아기를 둘러메고 발품을 팔았다. 두 군데에서 퇴짜를 맞고 그나마 찾은 한 곳은 집에서 차를 타고 30분은 나와야 하는 곳이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계약을 하고 그나마 이렇게 촉박한 시간에 돌잔치를 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그리고 2월 말, 신천지 사태가 터졌다. 하루에 확진자가 300명씩은 우습게 나왔고 내 친정은 대구였다. 눈앞에 닥친 돌잔치보다도 저 난리통에 수난을 겪을 친정 식구들 생각에 밤잠을 설쳤다. 친정 식구들은 걱정하지 말고 자신들 없이 돌잔치를 하라고 했다. 그래도 아이 첫 생일인데 어떻게 그걸 안 할 수 있냐고. 자신들은 나중에 사진으로만 봐도 충분하다고.


물론 아이의 생일을 축하해주고 싶은 마음은 누구보다 내가 제일 컸다. 하지만 5초 만에 눈물을 흘리는 연기자처럼 아이 사진만 봐도 금세 눈물바람을 하는 친정 엄마가 마음에 걸렸다. 거기다 시댁 어른들은 누구보다 건강 염려증이 엄청난 분들이셨다. 온 나라가 들썩대는 역병의 시대에 한 달에 한 번 하던 외식조차 단칼에 끊어내신 분들이었다. 뷔페에서 모여 식사라니, 어불성설이었다. 결국 우리는 또 예약금을 날리며 뷔페를 취소해야 했다. 게으른 엄마가 돌스냅도, 돌 답례품도 미리 준비하지 않은 것이 신의 한 수였다고 웃으면서 말했지만 이미 억장은 모조리 주저앉아 있었다.


사실은 좋은 옷을 입히고 멋지게 꾸며서 사진을 찍어주고 싶었다. 엄마 배에서 열 달, 태어나 열두 달을 큰 탈 없이 무사히 커 준 것이 고맙고 대견해 사진을 남겼다고 말해줄 셈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 너의 생일을 축하했다고, 너는 사랑받는 아기였다고 알려주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너의 탄생이 우리 부부에게 이토록 큰 행복이라고,

너를 만난 것은 우리의 삶에 축복이었다고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조그만 케이크 하나와 몇 종류의 과일, 소박한 떡 정도만을 준비한 생일상 앞에 아기를 앉혔다. 돌 전에 사뒀지만 훌쩍 커버린 탓에 발목이 훤히 드러나게 된 옷을 입혀 소반 앞에 앉히고 노래를 부르며 동영상을 찍었다. 그 와중에 뭐 하나라도 제대로 해주고 싶어서 부랴부랴 주문 제작한 돌잡이 물품으로 돌잡이를 하고, 아이가 좋아하는 딸기를 잘라 먹이면서 그래도 생일 기분은 냈으니 됐다고 웃었다. 하지만 이렇게 해가 넘어갈 때가 되어서도 그것이 내내 마음에 걸린다. 아마 아이가 크는 내내 그럴 것이다.


태어나 처음 맞는 생일을, 겨우 집에서 초만 켜고 가족끼리 보낸 것은

아이가 크는 내내 잊을 수 없는 나의 죄가 될 것이다.




8월에는 남편이 개인회생 신청을 냈다. 둘이 벌어 겨우 지탱하던 생계를, 아이 탓에 1년을 넘게 외벌이로 버티던 차였다. 집 근처의 어린이집 중 돌을 채우지 못한 어린아이를 받아주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나는 꼼짝없이 1년을 아이와 함께 보내야만 했다. 돌만 지나면 어린이집에 보내야지 생각하던 때에 코로나가 닥쳤고 결국 우리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는 일 자체를 보류해야만 했다. 러시아, 중국 등 외국의 배들을 수리하는 일을 하는 남편의 회사는 코로나의 영향으로 일감이 뚝 끊어졌다. 지방의 중소기업은 반 이하로 뚝 떨어진 수주에 망하지 않는 게 용하다 싶을 만큼 휘청댔다. 그를 따라 줄어든 남편의 월급. 아슬아슬하던 우리의 생계는 순식간에 주저앉았다.


남편은 내게 미안하다고 했다. 자신이 조금만 더 제대로 벌었다면 좋았을 거라고 했다. 나는 빚에 쫓겨 머리맡으로 쥐가 드나들던 집에도 살아봤다고, 이 정도는 둘이 힘을 합치면 이겨낼 수 있다고 남편을 다독였다.


당장 살림부터 줄여야만 했다. 돈 계산에 밝지 못하다는 핑계로 남편에게 맡겨두었던 경제권을 넘겨받았다. 차마 아이를 위한 것들은 무턱대고 줄일 수가 없어서, 우리는 보험을 줄이고 적금을 깼다. 그것도 모자라 코로나 때문에 천정부지로 금값이 치솟던 때에 금붙이를 내다 팔았다. (사실 이건 지금 생각하면 정말 잘한 결정인 것 같기도 하다.) 배달 음식은 한 달에 한 번, 아이 기저귀와 물티슈는 싸고 양 많은 것으로. 간식을 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가성비. 코로나의 시대에 외출 자체를 줄였지만, 혹시라도 외출을 나서게 되는 날에는 택시비가 아까워 13킬로에 육박하는 아이를 안고 업고 걸어 다니며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게 되었다.




그리고 어제, 시누가 코로나 양성이 떴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천 물류센터에서 일하는 남자 친구와 크리스마스 연휴를 함께 보냈는데 하필 남자 친구가 확진되었다고 했다.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탓에 1년에 두어 번 명절 때나 얼굴을 보는 시누여서 접촉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았지만, 무려 가족이 코로나에 걸렸다는 소식에 식구 모두가 착잡한 것은 어쩌지 못했다. 시어머니는 전화기를 붙들고 한 시간이 넘게 방에서 통화를 하셨고 시아버님은 연예인이 나와 고기를 뜯으며 과장된 리액션을 하고 있는 홈쇼핑 채널을 20분이 넘게 틀어두셨다. 아이만이 아무것도 모른 채 이 방 저 방을 부산스럽게 걸어 다녔다. 남편은 올해 연말이 이제껏 겪어온 중 최악이었는데, 그 마지막을 누나가 화려하게 장식한다고 말하며 쓰게 웃었다.




되짚어 써보니 우리의 1년은 정말 가시밭길이었구나 싶다. 코로나는 아이의 첫돌부터 시누의 건강까지, 우리의 일상을 속속들이도 망가뜨렸다. 그러니 이 해가 그저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라게 되는 남편의 심정도 십분 이해가 된다.


제대로 서지도 못하던 아이는 어느새 의젓하게 아빠와 걸음을 맞춘다


하지만 어쨌든 2020년은 묵은해가 되었고, 나와 남편은 조금 더 늙는다. 또 아이가 한해만큼 더 자란다. 내가 한 살 늙는다는 슬픔보다 아이가 한 뼘쯤 더 자라는 게 기쁘다는 것은 엄마가 되고 난 이후 알게 된 신기한 감정이다. 비록 지옥 근처 어디쯤에서 황망히 헤매던 한 해였지만, 아이는 그 전쟁통 속에서도 걸음마를 떼었고 말을 조금씩 익혔다. 그 사실을 되씹으며 나는 또 남은 한 해가 밝아올 것을 기대하게 된다.



아이와 보낼 앞으로의 일 년은 부디 바라건대,

슬픈 일보단 즐거운 일이 많은 한 해가 되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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