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쓴 글을 밀었다.
브런치를 밀었다.
투병에 관한 글, 극장에서 급하게 써 내린 글, 감정에 휩쓸려 휘갈겨 쓴 글 모두 임시 저장함에 옮겼다. 사라진 내 글엔 미련이 남지 않는다. 개운함이나 후련함도 없다. 따뜻한 댓글을 읽기 어려워졌다는 아쉬움만 조금 남았다.
따뜻한 댓글들, 나라면 어땠을까. 감탄이 나오는 글에도 좋아요를 누르지 못하고, 구독한 브런치의 출판 소식에도 축하하지 못하며,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에도 마음껏 기뻐할 수 없는 나는. 당신의 글이 좋다며 댓글을 남기는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여전히 소설 읽기를 회피하고, 글 쓰는 일을 미루는 내가, 그를 질투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를 제외한 모두가 글을 쓰는 것 같은 세상이다. 나를 뺀 모두가 자신의 글을 완성해 서점 한편에 꽂아놓는다. 알고 있다. 이 시간에 차라리 글을 쓰는 게 내가 할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침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우울증에 수면장애라는 좋은 핑계도 있겠다. 내일은 정말 글 써야지 생각하며 그냥 잠들어버린다.
소설을 펼치기가 두려웠다.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김초엽, 천선란, 정세랑. 그들의 모든 글에, 그들이 만든 모든 문장에 질투가 났다. 어떻게 이렇게 쓸 수 있는 거지? 저런 재능을 가지는 건 무슨 기분일까? 그렇다고 에세이를 펼칠 수도 없었다. ‘월간 이슬아’의 이슬아,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의 김하나, 황선우. 그들의 책은 마치 ‘너에겐 이런 꾸준함이 없어.’라고 말하는 듯했다.
눈물을 삼키고 책을 덮었다. 정말 좋아하고 존경하는 작가님들인데, 나는 어쩌다 이런 마음을 갖게 되었을까. 절망하며 몇 날 며칠을 그저 살기만 했다. 읽은 책을 리뷰하는 인스타 계정은 얼어붙었고, 독서 기록 어플도 책을 쌓길 멈췄다. 리디셀렉트나 밀리의 서재는 의도적으로 켜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책에서, 글에서 멀어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럴 리가 없지. 내 좁은 방을 가득 채운 책에선 멀어지려야 멀어질 수 없었다. 즐겁게 읽은 책이, 재밌어 보이는 책이, 흥미진진하게 읽고 있는 책이 베개 옆에, 책상에 놓여있었다. 책 표지를 보고 있자니 그 책을 처음 읽을 때의 설렘이 기억났고, 가장 좋았던 문장이 떠올랐다. 내 마음을 대변하는 듯한 문장을 보며 비로소 숨 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순간이 되살아났다. 어쩔 수 없다. 나는 글을 너무 좋아한다. 책을 숭배하고, 글 쓰는 일을 사랑한다.
나에겐 재능도 꾸준함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나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게 가장 먼저 내가 할 일이 되었다. 나에겐 재능이 없다. 꾸준하지도 않다. 한 것도 없는데 핑계를 대고 틈만 나면 휴식을 취한다. 그 사실을 되뇌는 건 칼에 찔린 느낌이 아니다. 종이에 베이는 느낌, 아주 얇은 종이가 온몸에 생채기를 내는 것 같았다.
꾸준함이 없어 글을 쓰지 못했고, 글을 쓰지 못하는 자신을 인정할 수 없어 괴로움에 빠졌다. 하지만 그 모든 걸 이길 정도로 나는 글을 사랑한다는 걸 알았다.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다. 내가 할 일은 글을 쓰는 것뿐이다. 그게 잘 쓴 글이든, 못 쓴 글이든 세상에 내놓고 모두에게 보여줄 수밖에 없다.
글을 공개한다는 건 넓은 헬스장에서 운동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내가 헬스 초보라면 더더욱 위축되는 환경에서, 옆에선 100kg, 120kg을 거뜬하게 들어 올리는데 나는 20kg을 겨우겨우 들고 있을 때.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하고 나도 언젠가 저 무게를 들 수 있겠지 라며 희망차기도 한다. ‘글력’은 ‘근력’ 이랬으니 아마 크게 다르지 않을 듯싶다. 먼저 출판한 사람을 부러워하고, 나도 언젠가 책을 출판할 수 있겠지 라며 희망을 가진다.
글로 쓰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문장을 책에서 보았다. 내년까진 반드시 출판 작가가 되기. 글을 포기하지 않기. 응, 할 수 있고 말고. 그런 의미에서, 다시 한번 잘 부탁드립니다!
*정말 좋아하는 작가님들이지만, 글의 분위기로 인해 존칭이 생략되었습니다. 만약 작가님들이 이 글을 읽게 된다면 정말 팬이라는 말을 드리고 싶네요. 특히 김하나 작가님 왕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