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은 지켜라

by thinking cloud

개발부 김전무가 아침부터 내 눈치를 본다. 오다가다 슬쩍슬쩍 내 자리를 눈으로 찍고 넘어가는 것이 심상치 않다. 내가 통화 중이거나 미팅 중일 때를 피해 이윽고 기회를 잡은 김전무가 내 자리로 온다. 손으로 가린 무언가를 내게 내민다.


이게 뭐지? 혹시 선물? 아니, 이걸 왜 나에게? 김전무가 설마 나 좋아했나? 아니, 근데 김전무, 애 둘 있는 유부남인데?


찰나의 순간에 오만 생각이 지나는 사이 선물이 내 손안에 들어온다. 작고 네모지고 가벼운... 포스트잇이다. 거기에는 낯선 계좌번호가 적혀있다, 김대리가 낮은 소리로 읊조린다.

- 이번 달 월급날 급여는 원래 통장에 넣어주고 보너스는 이 통장에 따로 넣어줘.




오만 생각했던 찰나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다. 바야흐로 보너스의 계절. 선물 받은 건 고작 귀찮은 일일 뿐이다. 머리가 끓어오르며 스팀이 뿜어지기 시작한다. 이미 급여 산정은 끝났고 급여 이체 파일도 완성해둔 상태인데 통장이나 금액이 바뀌면 아무래도 번거롭고 신경이 쓰여 한 번을 더 확인하게 된다. 돈을 따로 넣어달라는 말은 급여명세서도 두 개를 만들어야 된다는 말이었다.


나보다 직급이 몇 단계 높은 상사라서 군말해봐야 불리한 건 나지만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를 물었다. 김전무는 솔직했다. 낚시 장비를 장만하고 싶은데 지금도 포화상태라 부인이 알면 허락해주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흐음, 그러니까 지금 나보고 댁의 비자금 조성하는데 협조하라는 얘기?

이유를 묻지 않는 게 나을 뻔했다. 모르면 정상참작으로 치지만 알고도 나쁜 짓에 가담하는 꼴이니까. 하지만 내가 무슨 힘이 있겠는가. 김전무의 보너스는 결국 비상금 통장으로 들어갔다. 김전무가 마음에 드는 낚싯대를 샀는지 알 수 없다. 집에는 이번에 회사가 사정이 어려워서 보너스가 안 나왔다는 핑계를 대었으려나. 김 전무의 부인이 믿을까 안 믿을까.


한편으로는 김전무의 이유가 다행스러웠다. 비상금을 만들어 고급 술집에 가던가, 내연의 관계에 있는 사람과 여행을 가는 게 아니어서. 불륜의 용도로 비상금 계좌를 내게 준 사람이 있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척 보면 알았다. 남의 불륜에 이용당하는 내 신세의 한심함과 양심의 가책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부인이 갑자기 찾아와서 나까지 싸잡아 질책한다 해도 할 말이 없을 것 같았다.

상사만 아니면 이런 부탁은 당연히 아웃. 하지만 이 놈의 가정분란범 상사들이 문제다. 아쉽게도 상사의 가정은 내가 지킬 수 있는 범위가 아니다. 상사의 명령에 어쩔 수 없이 따르게 된 경우는 무조건 함구한다. 김전무 외 내가 비상금을 보내줬던 모든 상사의 가정이 무탈하고 행복하기를 기원한다.




이 밖에도 회사에는 공공연하게 비밀이 많다. 주워들은 사소한 얘기라도 외부에 잘못 새어나갔다가는 문제가 커질 수 있다. 재수없으면 관재 소송까지 일어날 수 있으므로 회사 안에서 퍼지는 얘기들은 농담도 비밀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처음부터 끝까지 루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