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도 나이가 든다.

감정의 나이

by 여아리

오늘 친구와 오랜만에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울이라는 감정도, 나이가 들면 새로운 얼굴로 찾아오는구나 하고.

예전의 우울은 거칠고도 분명한 파도였다.
감정이 몰아치면 하루 전체가 흔들렸고,
왜 이렇게 힘든지, 왜 나만 이런 건지
끝없이 되묻게 되는 날들이 수없이 많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우울은 조금 다른 형태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더 조용하고, 더 담담하고…
마치 먼발치에서 “나 왔어” 하고 인사만 건네는 듯한 느낌.

친구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나이가 들수록 무엇이든 그렇게 크게 힘을 쓰지 않게 된다고.
감정을 붙잡지도, 억지로 밀어내지도 않고,
그저 “그래… 다 그런 거지” 하며 흘려보내는 법을 배우게 된다고.

그 말에 고개가 끄덕여지면서도
마음 한편이 살짝 쓸쓸해졌다.
여유로움이 행복의 얼굴보다는
조용한 체념의 얼굴에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모든 감정이 선명했다.
기대도 컸고, 실망도 컸고,
마음 한 조각만 움직여도 세상이 달라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의 여유는 어쩌면 ‘내려놓음’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이든 관계든, 애쓴다고 해서
언제나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몸으로 배워온 시간들 덕분일 것이다.

가끔 생각한다.
‘이 끝이 이렇게 흘러갈 걸 일찍 알았다면
그렇게 큰 에너지를 쓰지 않았을까?’

하지만 곰곰이 되짚어보면
그때의 나는 그때의 전부로 살아낸 것뿐이었다.
몰랐기 때문에 더 열심히 사랑했고,
모르니까 마음을 다 써서 울었고,
알지 못했기에 기대했고 실망했으며,
그 모든 과정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왔다.

지금 느껴지는 허무함은
후회에서 오는 감정이 아니라,
‘아, 인생이란 것이 결국 이렇게 흘러가는구나’
하고 이해하게 되었을 때 찾아오는
조용한 감정에 가깝다.

나이가 든다는 건
감정이 사라지는 일이 아니다.
감정을 바라보는 거리가
조금씩 멀어지는 일이다.

그리고 그 멀어진 자리에서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는 풍경이 있다.

오늘은 그 풍경을,
아주 조금 이해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