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출생: 인정의 장에 던져지는 존재

우리는 서로를 태어나게 한다.

by 연담



생명체란 매혹적이다. 그러나 그 매혹은 단순한 경이의 감탄으로 붙잡히지 않는다. 생은 이미 시작되어 있으면서도 아직 완전히 시작되지 않은 상태를 포함한다. 심장은 뛴다. 폐는 공기를 받아들인다. 신경계는 빛과 소리에 반응한다. 그러나 그 존재가 “누군가”가 되는 순간은 언제인가. 출생의 순간인가, 울음의 순간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얼굴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그 시선이 되돌아오는 순간인가.



우리는 출생을 시작이라 부르지만, 그 시작이 무엇의 시작인지 충분히 묻지 않는다. 생물학적 생명의 시작과 사회적 생명의 시작은 겹치지만 동일하지 않다. 한 아이가 태어난다는 것은 단지 한 몸이 세상 밖으로 나오는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관계적 장 안으로 들어오는 사건이다. 부모의 행위는 단순히 생명을 낳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세계로 초대하는 것이다. 초대는 선언이 아니라 분위기다. 언어 이전의 감각적 장, 접촉하는 피부면들, 붙잡는 손의 압력, 얼굴 표정의 미묘한 긴장, 음성의 리듬과 억양 속에서 초대는 이미 이루어진다.




image.png 산도르 페렌치는 헝가리 출신 정신분석가로, 외상과 상호성을 강조하고 mutual analysis 같은 급진적 실험을 통해 역전이의 임상적 가치를 확장했다.




산도르 페렌치(Sándor Ferenczi, 1873~1933)는 이 초대의 성격을 끝까지 밀어붙였던 정신분석가였다. 그는 프로이트의 가까운 동료이자 초기 정신분석 운동의 중심인물이었으며, 아들러와 융의 이탈 이후 구성된 위원회의 핵심 멤버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운동을 수호한 인물이 아니라, 그 내부에서 가장 불편한 질문을 던진 사람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혹함을 통과했고, 정치적 격변 속에서 학문적 지위를 잃었으며, 임상에서 만난 환자들의 절망을 통해 생의 취약성을 직면했다. 그는 생을 낙관적으로 전제하지 않았다.



1929년 「The Unwelcome Child and His Death-Instinct」에서 그는 말한다. 아이의 생명력은 타고난 강력한 힘이 아니다. 아이는 비존재 non-being에 가깝다. 그리고 아이는 부모를 용서해야 한다. 자신을 의도하지 않은 채 이 세계로 데려온 것에 대해. 이 문장은 출생을 축복의 서사에서 떼어내어 윤리적 질문의 장으로 옮긴다. 용서라는 단어는 이미 상처를 전제한다. 상처가 없다면 용서는 필요하지 않다. 그렇다면 태어남은 무엇을 전제하는가.



It is true that the organs and their funcitons develop at the beginning of life within and wihtout the uterus with astonishing profusion and speed-but only under the particularly favourable conditions of germinal and infantile protective environment. The child has to be induced, by means of an immense expenditure of love, tenderness and care, to forgive his parents for having brought him into the world without any intention on his part; otherwise the destructive instincts begin to stir immediately. And this is not really surprising, since the infant is still much closer to individual non-being, and not divided from it by so much bitter experience as the adult. Slipping back into this non-being might therefore come much more easily to children. The life force which rears itself against the difficulties of life has therefore not really any great innate strength, and becomes established only when tactful treatment and upbringing gradually give rise to progressive immunization against physical and psychical injuries. Corresponding to the drop in the curve of mortality and disease in middle age, the life-instinct would only counterbalance the destructive tendensies at the age of matu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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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생존 본능을 기본값으로 상정해 왔다. 생은 유지되려는 힘을 갖고 있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페렌치는 생이 설득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이는 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이는 아직 사회적-상징적 존재로 자리 잡지 못한 상태, 아직 문장 속에 편입되지 않은 단어와 같다. 그가 말한 non-being은 생물학적 부재가 아니라, 상징적 미배치 상태다. 아직 의미의 구조 속에 배치되지 않은 존재. 아직 “너”로 불리지 않은 존재.




생은 비존재 non-being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다. 비존재 또한 하나의 균질한 상태가 아니다.

우리는 적어도 세 가지 층위를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생물학적 전(前) 존재다.

수정 이전, 세포 이전, 아직 유기적 조직이 형성되지 않은 상태. 이 층위는 철저히 생물학적이다. 생의 가능성은 있지만, 아직 신체적 현실로 실현되지 않았다.


두 번째는 상징적 미편입 상태다.

아이는 이미 생물학적으로 살아 있다. 심장은 뛰고, 몸은 반응한다. 그러나 아직 사회적 질서 속에 배치되지 않았다. 이름으로 호명되지 않았고, 의미의 구조 속에 위치 지어지지 않았다. 페렌치가 말한 non-being은 바로 이 두 번째 층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그는 갓 태어난 아이가 비존재에 더 가깝다고 말했다. 그것은 생물학적 부재가 아니라, 아직 상징적 질서에 편입되지 않은 상태를 뜻한다.


이 두 번째 층위는 잠재적이다. 아직 결정되지 않았고, 열려 있다. 감각의 밀도 속에서 아이는 세계를 경험한다. 반복된 응답과 일관된 감각 속에서, 점차 상징적 구조가 형성된다. 이름이 붙고, 위치가 주어지고, 응시가 되돌아오면서 아이는 주체로 자리 잡는다.


그러나 세 번째 층위는 다르다.

관계적 철회 상태.

이것은 손상 이후의 비존재화다.


이미 생물학적 존재로 태어났고, 이미 상징적 질서 속에 부분적으로 편입되었으나, 반복된 거부와 왜곡된 응답 속에서 다시 비존재 쪽으로 밀려나는 상태. 이때 비존재는 미결정이 아니라 철회다. 수동적 미편입이 아니라 능동적 수축이다.


여기서 “환영받지 못한 아이”는 단순히 두 번째 층위에 머무르는 존재가 아니다. 그는 세 번째 층위로 밀려난 존재일 수 있다.




거울이 되돌려주는 얼굴 속에서 아이는 자기 자신을 본다. 되돌아오는 응시 속에서 아이는 위치를 본다. “너는 여기 있다.” “너는 이렇게 보인다.” 반사와 위치는 하나의 살아 있는 장 안에 얽혀 있다. 아이는 정서적 공명과 상징적 배치가 동시에 작동하는 중간 지점에서 주체로 자라난다. 그러나 이 두 장면이 따뜻한 조율 속에서 겹치지 못할 때, 아이는 자신을 온전히 경험하지 못한다. 감각은 왜곡되고, 위치는 위협이 된다. 인정은 일방적 반사도, 일방적 규정도 아니다. 인정은 상호적 사건이다. 나는 느끼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타자에게 의미를 갖는 존재임을 경험하는 순간. 이 상호성이 깨질 때, 생은 철회된다.



그렇다면 생이 설득되어야 한다면, 그 설득은 어디서 오는가. 감각적 일관성에서 오는가, 반복된 응답에서 오는가, 명명에서 오는가, 아니면 타자의 욕망에서 오는가. 설득은 단일한 원천에서 오지 않는다. 감각적 안정은 세계를 견딜 수 있게 만들고, 명명은 세계 속에 자리를 부여하며, 타자의 욕망은 존재에 방향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인정의 장 안에서만 응집된다. 출생은 생물학적 사건이 아니라 인정의 장에 초대되는 사건이다.



설득은 논리적 설명이 아니다. 설득은 예측 가능성의 축적이다. 울음이 어떤 얼굴을 불러오는지, 손을 뻗었을 때 무엇이 닿는지, 긴장이 높아졌을 때 누가 어떻게 다가오는지. 반복 속에서 세계는 혼돈에서 리듬으로 이동한다. 설득은 세계가 대략 다음을 예상할 수 있는 장으로 변해가는 과정이다.


설득은 타자의 응답이 파괴적이지 않다는 반복된 경험이다. 보호를 기대한 자리에서 침범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아이의 감각적 언어가 성인의 욕망적 언어에 의해 덮이지 않는다는 것. 이 경험이 누적될 때 아이는 자신의 감각을 신뢰하기 시작한다. 숨은 깊어지고, 어깨는 내려가며, 시선은 오래 머문다. 몸은 배운다. 이 세계는 즉각적으로 나를 부수지 않는다는 것을.


설득은 세계가 견딜 만하다는 신체적 증거의 축적이다. 울고 난 뒤에도 버려지지 않았던 경험, 놀랐을 때 누군가가 돌아왔던 경험, 실수했을 때 관계가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던 경험. 이러한 경험들이 체내에 남는다. 세계가 견딜 만하다는 증거가 축적될수록, 생은 억지로 유지되는 기능이 아니라 확장 가능한 방향이 된다.




생이 설득되어야 한다면, 우리는 그 설득을 아이에게만 요구할 수는 없다.


아이에게 “너는 이 세계를 받아들여야 한다”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출생의 폭력성을 은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페렌치는 아이가 부모를 용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문장은 급진적이다. 태어남이 상처일 수 있음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문장을 더 오래 붙잡고 있으면, 다른 질문이 따라온다.



아이가 부모를 용서해야 한다면,

부모는 누구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는가.


자신의 욕망에게인가.

자신을 낳았던 자신의 부모에게인가.

자신을 규정했던 사회에게인가.

아니면 존재 그 자체에게인가.



부모는 먼저 자신의 욕망과 마주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이를 낳고자 했던 그 욕망은 무엇이었는가. 사랑이었는가, 결핍의 보상이었는가, 사회적 요구였는가, 고독을 견디지 못한 선택이었는가. 욕망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욕망이 성찰되지 않을 때, 그것은 타자에게 침범이 될 수 있다. 부모는 자신의 욕망이 아이의 언어를 덮어버리지 않도록, 욕망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부모는 자신의 부모에게, 즉 자신을 낳았던 관계의 장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인정의 장 안에서 태어났고, 그 장의 온도를 몸에 새긴다. 만약 부모 자신이 충분히 인정받지 못했다면, 그는 아이를 환대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이때 용서는 단순히 도덕적 행위가 아니라, 세대 간의 반복을 멈추는 결단이 된다.


사회는 또 다른 층위다. 출생은 개인적 사건이지만 동시에 사회적 사건이다. 어떤 사회는 출산을 미화하고, 어떤 사회는 그것을 의무로 만들며, 어떤 사회는 특정한 조건에서만 환대를 허락한다. 부모의 욕망은 사회적 언어에 의해 규정된다. 부모가 아이를 환영하지 못하는 상황은 때로 개인의 도덕적 실패라기보다 구조적 압력의 결과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부모의 용서는 사회적 구조에 대한 질문을 포함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부모는 존재 그 자체 앞에 서야 할지도 모른다. 아이를 세계로 초대하는 일은, 단순히 한 생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를 세계의 조건 속에 던지는 일이다. 그 조건은 고통과 상실, 경쟁과 죽음을 포함한다. 부모는 이 조건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 그렇기에 출생은 언제나 잠재적 폭력의 성격을 지닌다. 그러나 그 폭력은 인정과 책임 속에서 다른 의미를 얻는다.




출생은 단순히 한 쌍의 부모가 한 아이를 낳는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세대의 연쇄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부모의 욕망은 순수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결핍, 인정받지 못했던 상처, 사회적 압력, 문화적 규범, 사랑에 대한 환상, 고립에 대한 두려움이 얽힌 복합적 구조다. 아이는 그 욕망의 장 안으로 초대된다. 그러나 그 욕망이 정제되지 않은 채로, 자신의 상처를 반복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면, 초대는 배신으로 변한다.



페렌치가 외상을 관계적 배신으로 보았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아이는 부모의 보호를 전제한다. 보호를 기대하는 자리에서 침범이 일어날 때, 세계는 단순히 차갑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신뢰를 잃는다. “혼동”은 단지 오해가 아니라, 층위의 침범이다. 아이의 감각적 언어가 성인의 욕망적 언어에 의해 압도될 때, 아이는 자신의 경험을 신뢰할 수 없게 된다. 이때 외상은 내부 충동의 폭발이 아니라, 관계의 붕괴에서 발생한다.



페렌치는 환영받지 못한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서도 자살 충동과 비관, 자기 파괴적 행위에 시달린다고 말한다. 이것은 단순한 병리의 설명이 아니다. 초기 장의 온도가 상징화의 구조에 남긴 흔적이다. 세계는 나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최초의 가설이 수정되지 않은 채 굳어질 때, 생은 수축된다.





비존재 non-being의 세 층위를 떠올려보자.


생물학적 전존재는 아직 가능성의 영역이다.

상징적 미편입 상태는 미결정의 영역이다.

관계적 철회 상태는 손상 이후의 영역이다.


환영받지 못한 아이는 단지 미편입 상태에 머무는 존재가 아니다. 그는 이미 상징의 장에 발을 들였으나, 배신과 왜곡 속에서 다시 철회된 존재일 수 있다. 그의 자살 충동과 자기 파괴적 반복은 생물학적 본능의 오류가 아니라, 인정의 장이 붕괴된 흔적일 수 있다.



이때 용서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아이가 부모를 용서하는 순간은, 세계와의 계약을 다시 맺는 순간이다. 그러나 그 계약은 일방적일 수 없다. 부모 또한 자신의 욕망과 상처를 인식하고, 아이의 감각적 언어를 존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인정은 상호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나는 너를 보고, 너는 나를 본다.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승인하면서 동시에 서로에게 책임을 진다.



생은 본래 강력한 본능이 아니라, 인정의 장 안에서 조직되는 균형일지도 모른다. 감각적 일관성은 생존을 가능하게 하고, 명명은 위치를 제공하며, 타자의 욕망은 방향을 부여한다. 그러나 인정은 이 모든 층위를 관통하는 사건이다. 출생은 생물학적 사건이 아니라 인정의 장에 초대되는 사건이다. 그리고 그 초대는 윤리적이다.


아이에게 생을 설득하기 전에, 부모는 자신의 욕망을 설득해야 한다. 자신의 상처를 마주해야 한다. 자신이 속한 사회의 언어를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의 감각적 언어를 압도하지 않을 준비를 해야 한다.



아이가 부모를 용서해야 한다면, 부모는 자신의 욕망과 역사와 구조를 향해 먼저 용서를 구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용서의 과정 속에서만, 출생은 폭력이 아니라 약속이 될 수 있다. 사랑과 책임의 약속.




우리는 서로를 태어나게 한다.

그러나 그 태어남은 책임을 요구한다.

출생은 책임이 전가되는 사건이 아니라, 책임이 재분배되는 사건이다.



생은 설득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설득은 상호적이어야 한다.

존재는 실체라기보다 맥락 속에서 유동하는 장이다. 그래서 생은 본래 강력한 힘이 아니라 반복된 인정의 축적 위에 세워진 균형이다.



생은 당연하지 않다. 생은 관계 속에서 유지된다. 그리고 외상은 충동의 문제가 아니라, 언어가 언어를 배신하는 순간에 시작될 수 있다. 아이의 감각적 언어가 존중될 때, 생은 확장된다. 그러나 그 언어가 압도될 때, 존재는 조용히 수축한다. 욕망은 줄어들고, 기대는 낮아지며, 존재는 최소화된다.



어쩌면 분석은 수축한 존재에게 응답을 보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철회된 존재를 다시 인정의 장 안으로 초대하는 일. 이미 한 번 밀려난 존재에게, 다시 설득을 시도하는 일. 분석은 새로운 의미를 가르치는 일이 아니라, 이미 왜곡된 최초의 계약을 다시 협상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생은 한 번의 사건이 아니다. 생은 반복되는 초대다. 우리는 평생 동안 이 초대의 설득을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타인의 얼굴 속에서 나를 보고, 타인의 응시 속에서 나의 자리를 확인하며, 상호적 인정이 장 안에서 다시 한번 존재를 수락하기 위해. 그래서 출생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는 방식 속에서 계속해서 서로를 태어나게 한다. 생은 당연하지 않다. 생은 매일 설득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설득은 언어 이전의 몸짓에서 시작되며, 상징의 구조 속으로 천천히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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