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리뷰 #23
이탈리아 인근 지중해. 총상을 입은 남자가 어부들에 의해 구출됐다. 겨우 의식을 찾게 된 남자. 하지만 그는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왜 총에 맞았던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남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더그 라이만(Doug Liman) 감독에 의해 제이슨 본(Jason Bourne)이 눈을 떴다.
정말 오래간만이다. 맷 데이먼이 연기한 제이슨 본이 2007년 <본 얼티메이텀>에서 물에 풍덩 빠져버린 이후로 나타나지 않았으니 햇수로 따지면 9년만인 셈이다.
1편격인 <본 아이덴티티>를 연출했던 더그 라이만 감독은 영화를 속도감 있게 만들 줄 아는 감독이다.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나 <점퍼> 같은 영화도 나름 짜임새 있게 만들어진 작품이었고 모두 개인적으로 즐겨봤던 영화들이다.
본 시리즈라면 더그 라이만과 맷 데이먼 말고도 이 사람을 절대 빼놓을 수 없다.
폴 그린그래스 감독
더그 라이만 감독 손에 의해 탄생한 본 시리즈를 정상궤도에 올린 감독이 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둘의 조합이 우리가 기다렸던 첩보물 본 시리즈로 돌아왔다.
자취를 감추고 사라졌던 제이슨 본(맷 데이먼)은 반정부 시위가 벌어져 한참 아비규환 속에 빠져있는 그리스에서 니키(줄리아 스타일스)와 은밀하게 만난다.
니키가 어렵사리 손에 쥐게 된 파일은 과거 본을 둘러싼 CIA의 인간병기 프로젝트 '트래드스톤 프로그램'과 본의 아버지의 알 수 없는 죽음 그리고 CIA의 거대한 음모가 담겨있다. 이를 인지하게 된 본, 그리고 본이라는 인간병기를 복귀시키려는 CIA 사이의 암투가 이 영화의 핵심이다. 본을 뒤쫓는 CIA 듀이(토미 리 존스)와 저격수(뱅상 카셀) 그리고 위협을 가하다가도 위기의 순간 본에게 조력하는 헤더 리(알리시아 비칸데르)가 본과 맞닥들인다.
맷 데이먼이 없는 본 시리즈는 '팥이 들어있지 않은 찐빵' 같은 것.
<본 레거시>를 재미있게 관람했던 관객들 또는 본 시리즈의 팬들에겐 다소 안타깝지만, 맷 데이먼이 없는 거대한 빈 공간의 중요성은 이미 <본 레거시>를 통해 증명되었다고 할 수 있다. 본 시리즈의 4편격인 <본 레거시>에서는 맷 데이먼의 얼굴이 사진으로나마 잠시 등장한다. 하지만 제레미 레너가 등장한 <본 레거시>는 본 시리즈와는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듯했다.
그만큼 맷 데이먼이 연기한 제이슨 본의 존재감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고 <본 레거시> 자체를 본 시리즈에서 '없었던 작품'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당연하게도 본 시리즈의 원조 팬들은 제발 제이슨 본이 돌아와 주기를 학수고대했다. 제작진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폴 그린그래스와 맷 데이먼은 본 시리즈의 후속작을 제작하기 위해 몇 차례 미팅을 갖고 많은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감독도 배우도 있으니 제작비 받아서 영화만 만들어내면 되는 게 아니었을까?'라고 생각했으나 본 프로젝트는 그렇지 않았다. 영화 속에서 언급된 '에드워드 스노든' 케이스나 그리스의 반정부 시위 같은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스노든은 CIA에서 일했던 컴퓨터 엔지니어로 가디언지를 통해 미국 내 통화감찰 기록, 감시 프로그램 등 기밀문서를 공개해 큰 파장이 일어난바 있다. 그리스의 반정부 시위는 또 어떠한가? 그리스 국기가 나부끼는 현장 속에서 우리는 본의 얼굴에 집중한다. 두건을 쓰고 경찰과 대치한 시위대. 그저 본을 위한 배경일뿐이겠으나 누군가에게는 상징적일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그게 '진짜'였다는 점에서 무겁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게 무슨 말이냐고? 이처럼 본 시리즈는 탈냉전시대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주변 환경과 시대적 배경이 제이슨 본과 함께 어우러져 관객들이 '진짜'처럼 느껴질 수 있도록 만들고자 했다. 그게 바로 제작진이 꿈꿨던 '제이슨 본 부활' 프로젝트의 기본이라 할 수 있다.
제이슨 본에 담겨있는 플롯이나 그가 펼치는 액션 등 모양새는 전작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른 노선을 태우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본을 그려낸 연출은 이미 본 시리즈에게 익숙한 관객들에겐 '새로움'이라는 것 자체를 느낄수 조차 없을 수 있다. '새로운게 없으니까!' 하지만 결코 지루하지 않다. 통쾌하게 펼쳐지는 액션과 서사구조, 속도감 있는 이야기 전개가 CIA와 본 사이에서 벌어지는 블록버스터급 격투와 조화를 이뤄 흥분을 자아낸다. 충분하다.
토미 리 존스 X 알리시아 비칸데르 X 뱅상 카셀
멋지게 돌아온 맷 데이먼의 모습과 잘 어울리는 조연들의 힘도 무시할 수 없다. 본 시리즈 내내 열심히 본을 지지해준 인물이 바로 니키다. 어쩌면 니키라는 존재만이 본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동료가 아닐까? 본을 실시간으로 감시하고 감청하는 수많은 존재들은 모두 적이라 해도 무리가 없다. 이번 시리즈에서 본의 적대자로 등장한 인물이 바로 토미 리 존스다. 여러 개의 모니터를 보며 본을 추적하는 듀이는 외형적으론 나라를 위한 애국자이자 정당함을 말하는 CIA 요원이지만 결국엔 자신의 안위와 야망에 눈이 멀어버린 악의 화신 같은 존재다. 워낙 필모그래피가 강력한 배우라 그가 연기한 듀이 캐릭터는 그만큼 흠잡을 곳이 없었다. 다만 세월의 흔적이 얼굴에 고스란히 남아 조금은 안타까웠다. 어찌하겠는가? 사람은 누구나 늙는 것을.
토미 리 존스(70)와 약 40년이라는 세월의 격차가 있는 알리시아 비칸데르(28)가 이 영화의 히로인으로 등장한다. 그녀가 연기한 헤더 리는 듀이와 함께 본을 쫓는 스탠퍼드 출신의 사이버 전문가로 설정되었다. 본 프로젝트가 말하는 시대적인 상황에 가장 걸맞은 캐릭터라 할 수 있겠다. 저 위에 있는 어느 누군가가 '빅 브라더'가 되어 또 다른 누군가를 감시한다는 본 시리즈의 아주 기본적인 설정 속에서 알리시아가 연기한 헤더 리는 IT 신기술과 사이버 안보에 능통하고 뉴 트렌드에 걸맞는 새로운 세대로 등장한다. 오랜 세월을 견뎌온 듀이 그리고 CIA와 결투를 벌이는 본, 그 둘이 살고 있는 세상과는 또 다른 세계에서 온듯한 느낌을 준다. 머리 한번 풀어헤치지 않고 온종일 모니터와 여기저기 들려오는 시그널에 집중하는 그녀, 이 영화와 충분히 어울린다.
듀이와는 정신적으로, 헤더 리와는 오묘하게. 하지만 뱅상 카셀이 연기한 저격수 캐릭터와는 육체적으로 격돌한다. 다른 시리즈와 달리 본의 육체로 연기한 액션신이 크게 줄어든건 사실이다. 고작해야 길거리에서 격투를 하거나 중간중간 튀어나오는 요원들을 한방에 제압하는 씬만 존재할 뿐 액션에 할애한 시간은 많지 않다. 본을 연기한 맷 데이먼도 스나이퍼의 뱅상 카셀도 모두가 지칠만한 나이가 아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팩트 있는 액션신은 감질날 정도로 아쉬움이 남았다. 그 아쉬움은 라스베가스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장갑차와 머슬카의 카 체이싱 액션이 대신해준다. 속이 시원할 정도의 쾌감을 주는 카 체이싱 시퀀스는 짜릿함 마저 느낄 수 있다.
본 시리즈, 이 시대가 낳은 첩보영화이자 새로운 전형이 되다
그렇다. 제임스 본드가 냉전시대에 빛났던 첩보영화의 아이콘이었다면 제이스 본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탄생시킨 인간병기이자 지금의 트렌드를 반영한 스파이 액션의 전형이 되었다.
잘 알고 있다시피 첩보영화는 너무나 많다. 제임스 본드의 <007> 시리즈나 톰 크루즈가 연기했던 에단 헌트의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 그리고 트렌디의 갑인 <킹스맨>까지 첩보물은 우후죽순 늘어났다. 오랜 역사동안 우리와 함께 해온 <007>은 007 캐릭터를 교체시키며 변화를 꿈꿔왔다. 제임스 본드가 누구냐에 따라 액션의 비율도 달라졌다. 007 시리즈가 오래 전부터 전세계 팬들과 함께 해온만큼 '감히' 첩보영화의 원조세대라고 말하고 싶다. 이와 비슷한 느낌을 주었던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는 톰 크루즈의 목숨 건 연기와 스턴트, 블록버스터급 스케일로 볼거리를 주었다.
본 시리즈? 본 시리즈는 큰 변화도 없고 맷 데이먼의 연기나 액션도 어떠한 기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시대적 배경을 그대로 반영하고 '오버'하지 않는 그리고 절대 과하지 않은 절제된 액션과 연기로 첩보영화의 새로운 트렌드를 가져왔다. 잘 짜여진 액션 연기나 능청스럽고 태연하며 자연스러운 동선 하나도 큰 볼거리를 제공한다.
많은 사람들이 얘기한다. 달라진 것 없다고. 전작과 같은 모습이라고. 길고 긴 공백을 다시 채웠지만 크게 변한 것이 없다. 안타깝냐고? 아니 오히려 반갑다. 그가 펼치는 첩보액션를 다시 볼 수 있게 되어 반가울 뿐. 제이슨 본은 첩보 액션의 전형이 되었고 여전히 '명불허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