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AI에 일을 맡겼다

by Pen 잡은 루이스

아주 바쁜 날이었다. 그냥 평범한 날이기도 했다. 글로벌 테크 회사에서 일하는 클라이언트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아, 이렇게 보면 평범한 날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어제 밀린 업무 더하기 오전에 눈처럼 소복이 쌓인 아름다운(?) 업무 역시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상태였지만, 일단 당장 미팅부터 소화해야 했다. 코로 먹었는지 입으로 먹었는지 몰랐을 점심을 챙기고 자리에 돌아오니 이번에는 팀장을 경유한 C레벨의 임무 지시가 기다리고 있었다. 급한 건 아니라고 했지만, 팀장은 ‘가능하면 빠르게’라는 말을 덧붙였다. 결국 급하지 않은 일조차 급한 일이 되어버리는 순간이었다. 급하지 않은데 왜 늘 ASAP인가.


오전에 밀린 일들은 그대로 쌓여 있었고, 오후에는 새로운 업무가 계속해서 더해졌다. 어떤 드라마에서 본 것 같다.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끝날 생각 없이 접시와 그릇들이 마구마구 쌓이는 것 같은. 콩쥐는 그렇게 밤새도록 설거지를 해야 했다는 뭐 그런 스토리 같은데. (아무튼) 무엇부터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급하지 않지만 급하다고 했던 C레벨 미션에 손을 대려던 순간 AI가 떠올랐다. '그래 이걸 이용해 볼까?' 구글 제미나이와 챗GPT 그리고 클로드를 동시에 호출해 필요한 문서를 넣고 프롬프트를 채워 넣었다. 고백하건대, 하나의 AI만 쓰는 건 어째 좀 불안하다. 어느 정도 그럴듯한 답을 내놓는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내가 원하는 방향과 어긋나는 결과가 나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리라. 특히 팩트 체크 측면에서 보면 하나의 답을 그대로 맹신하기보다 여러 관점에서 교차 검증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었다. AI 세계에서도 통할지 모르겠지만 '집단지성'과 같은 개념으로 여러 개의 답을 모아야 조금 더 정답이라는 지점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기대감도 내심 있었다. 어느 AI가 내놓은 결과를 다른 AI에 다시 넣어 장단점을 분석하게 하고 표현이나 문구 등도 다듬어달라고 요구했다. 동시에 팩트 체크도 함께 쿼리에 넣었다. 그렇게 몇 번의 '왕복과 반복'이 이어졌다. 처음 내가 써놓았던 초안(초안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하지만, 그래 대충 뼈대라고 하자)에다가 AI가 덧붙여준 내용들을 얹고 나니 어느새 그럴듯한 리포트 하나가 되었다. 나는 그 결과물을 팀장에게 넘겼다.


"이거 보고서 검토 좀 해주세요. 아까 요청하셨던 C레벨 자료입니다"

"수고했어요"


수고했다는 말은 분명히 나를 향해 있었다. 진짜 수고한건 AI인데 말이다. 뭐 그렇다고 그 말을 녹음해 mp3 파일을 던지면서 AI에 속삭이듯 '고생했다'라는 말을 굳이 할 필요도 없지만 이번만큼은 확실히 AI의 도움을 제대로 받았다는 생각이었다.


난 그저 AI에게 일을 맡겨둔 채 다른 일을 처리함과 동시에 리포트를 챙겼던 것이다. 얼마 전에 'AI는 우리 업무에 필수적인 도구가 될 것'이라며 글 하나를 썼었는데 그러면서도 '어디까지나 사람을 보조하는 역할이며 주체는 반드시 인간이어야 한다'라고 했다. 막상 이렇게 정신없이 바쁜 상황에 서성이다 보니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상황에 따라 우리는 AI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 순간이 온다는 걸 제대로 경험하게 된 셈이다.


완성된 리포트는 팀장의 손에 들어갔고 팀장은 그걸 다시 (필요한 경우에 한해서라지만 대부분 그러하듯) 교열하고 수정하고 검토를 거쳐 C레벨에 보고하게 될 것이다. 손을 댔으니 어쩌면 더 나은 결과물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그보다 못한 내용으로 바뀔 가능성도 있겠다. 다만 전체 내용이나 흐름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물론 초안은 내 손으로 만들어냈지만 결과는 AI가 해낸 것이니까. 이렇게 만들어진 결과물은 어떤 평가를 받게 될까.

"이거 AI가 쓴 건가?"라는 의심을 받을까, 아니면 "그럴듯한데, 아주 마음에 들어"라는 긍정적 평가를 받을까.

사실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결과물을 '누가 썼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쓸만한지'가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오늘처럼 일이 몰려드는 상황이라면 멀티 태스킹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야 하고 AI에게 의존할 수밖에. AI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싶다. "AI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다. 당연하지만 은퇴하는 그날까지 이런 순간은 몇 번이고 찾아오게 될 것이다. 사람이 모든 것을 다 감당할 수 없는 순간 AI는 이처럼 자연스럽게 빈틈을 채우게 될 것이다. 아주 고맙게도.


그래, 진짜 죽으란 법은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