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쉬어갈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세요

by Pen 잡은 루이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 빠르게 속도를 높이고 있다. 마치 수식어처럼 따라붙는 AI라는 것도 하루가 다르게 발전을 이루고 있으니 따라가기 바쁠 지경이다. 도심 풍경도 빠르게 지나간다. 출퇴근길 지하철은 창밖 풍경조차 바라볼 약간의 틈도 주지 않는다. 한강에 괴물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 그다지 다를 바 없는 아주 익숙한 풍경일 뿐이다. 카톡과 슬랙, 인트라넷, 회사 메신저는 아주 잠깐의 '정적'마저 툭 하고 잘라낸다. 내가 살아가는 데 있어 심장이 요동치며 온몸의 감각을 느끼는 순간이라면 무언가 이뤄냈을 때 혹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이다. 페이스를 유지하며 정해진 거리만큼 달리기를 할 때, 멍하니 창가에 앉아 커피를 한 모금 마실 때 비로소 존재의 무게를 느낀다.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아주 소중한 시간이다.


현대인들은 '공백의 시간'을 두려워할지도 모른다. 특히 외향적 성격이거나 '집순이 집돌이'와 완전 반대의 성향이라면, 무엇인가 해야 할 것 같은 강박에 뭔가 지금 멈춰 있으면 이것 또한 '낭비'가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엄습하기도. "지금 이 순간에도 다른 사람들은 무언가를 향해 달리고 있을 텐데 나는 왜 가만히 있는가"라는 초조함까지. 그러나 가끔 찾아오는 공백이라는 그 시간의 무게를 견디는 순간 우리는 그 안에서 초조함도 불안도 아닌 또 다른 여유를 찾게 된다.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핵심 개념으로 현존재(Dasein)라는 단어를 언급했다. 우리는 '세계 속에서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다. 그 시간을 늘 채워야만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 말하자면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구름이 흘러가는 걸 응시하는 시간, 장작을 태우며 소리를 듣는 불멍의 시간, 음악 하나 흐르지 않는 고요한 숲길을 걷는 산책의 시간에서도 '나는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는 본질을 경험하게 된다.


한나 아렌트라는 (역시 독일의) 철학자는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근본 조건으로 노동(Labor), 작업(Work), 그리고 행위(Action)를 제시했다. 우리의 하루 대부분은 노동과 작업으로 채워져 있다. 회의를 하면 회의록을 작성하고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수많은 리포트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메일을 보내고 메시지를 확인하며 끊임없이 반복되는 생산과 재생산의 과정을 거친다. 아렌트가 말하는 '행위'는 단순한 생산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활동이다. 인간이 자기 존재를 고유하게 빛내는 방식인 것이다. 무엇에도 쫓기지 않는 여백의 시간이 필요하다. 공백은 단순한 공허함이 아니라 인간다운 행위를 시작하게 하는 최소한의 토대다. 그래서 더 가치가 있다.


동양철학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노자의 '무위'는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채우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불교에서도 '공'은 단순하게 비어있는 개념이 아니라 비워냄으로써 드러나는 본질을 의미한다. 서양의 철학과 동양의 사유가 만나는 지점은 굉장히 분명하다. 공백은 결핍이 아니라 본질을 되찾는 길이다.


인공지능과 함께 하는 우리의 노동과 작업 사이에 ‘비어 있는 시간’을 잠깐이나마 담아두면 어떨까. 매일같이 스펙터클 하게 흘러가는 24시간 속에 작은 틈을 허락해 고요 속에 머무는 일. 그 순간은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는 나만의 시간이면서 내가 나를 만나는 자리이기도 하다. 공백의 무게를 견디는 일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잠깐 멈춘다고 해서 결코 뒤처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나의 시간을 되찾는 가장 적극적인 방식이 될 것이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을 오롯이 허락해 주기를. 나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