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ALUE!"
아는 사람은 아는 (엑셀) 오류 메시지다. 꼼꼼하게 잘 들여다봤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에러 메시지가 떴다. 어디선가 수식이 꼬인 모양이다. 그래서 역추적을 시작했다. 셀을 클릭하며 범인 찾기에 나선 셈. 이럴 땐 안경을 고쳐잡으며 아주 날카로운듯 예리한 눈빛으로 숫자를 바라본다. 마치 코난이나 김전일처럼 말이다. 얘네들은 엑셀 없이도 잘 살겠지만.
"아이스 아메리카노 얼음 가득 채워 주시고 샷 추가해주세요"
오전에는 어제 막 취합한 데이터 파일을 분석하려고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샷을 추가해봤다. (아, 쓰다 써) 자리에 앉아 빼곡히 적힌 숫자들을 바라봤다. 벌써부터 눈이 아프고 어지럽고 심장도 쿵쾅쿵쾅. 숫자 앞에서 또 한번 나약해지는 순간이다.
호기심 49% + 게으름 49% + 뭔지 모를 기대감 1% + 에라 모르겠다 1%를 적절히 섞은 다음 엑셀 표를 업로드 하고 대략적인 프롬프트를 써서 GPT에 맡겨봤다. 그리곤 커피를 홀짝이며 "thingking"이라는 메시지를 멍하니 바라보며 기다렸다. 전에도 느꼈지만 좀 느린 것 같다. 제미나이의 '빠른 모드'에서 돌려볼걸 그랬나. 어서 답을 내놓거라! 근데 GPT에서는 어떤 결과물이 나올까. 결과를 읊고 있는 중 도입부부터 몇가지 중요항목들을 아주 깔끔하게 정리했는데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내가 (어쩌면) 몇 시간이나 걸려서 했을 업무를 AI는 순식간에 정리가 가능했다. 느리다고 타박했지만 이정도 결과물이라면 더구나 1분도 걸리지 않았으니. 그리고 어쩌면 내가 놓쳤을 패턴까지 찾아냈다는 점도 흐뭇.
"오호, 짱인데."
슬랙에 밀린 답장을 보내고 챙겨야 할 프로젝트 확인하고 지라(Jira)에 올라온 내용도 좀 보고 파트너사와 미팅도 조정하고 팀 회의 가기 전에는 또 다른 파일을 AI에게 던졌더랬다. 내가 자리에 없는 사이에도 AI는 일했다. 오후에는 마케팅팀에서 준 자료를 보면서 셀을 하나씩 채워가며 데이터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숫자들 사이에서 특출난 수치가 보여 마케팅팀에 전화를 걸어 물었다.
"이 수치 보이시죠? 여기만 유독 튀는데 이슈가 있었던가요?"
"아, 이때 우리 프로모션 하나 했었어요"
이 자료를 받아서 바로 AI에 토스했다면 과연 프로모션 사실을 알 수 있었을까? 자료가 명확하고 그 내용까지 알차게 들어가 있었다면 가능했을 일이겠지만 추가 자료가 없으면 AI가 알 턱이 없다. 나중에는 AI가 마케팅팀에 확인한답시고 메시지도 보내고 메일도 보내고 그럴려나. 마우스를 클릭하고 키보드로 데이터를 입력하면서 맥락을 읽게 됐다. 숫자 뒤에 숨어있는 이슈들 혹은 시장의 흐름이라던가 프로젝트의 특성 등 AI라면 놓쳤을지도 모를 지점들 말이다.
다음 날 회의가 있었고 어제 열심히 분석했던 자료를 공유했다. AI로 돌린 리포트는 아주 깔끔했고 인사이트도 나름 명확했으나 한번 더 들여다보지 않았다면 그 속에 숨어있을 패턴이나 맥락 따위를 아예 놓쳐버릴 수도 있었다. AI는 명확하게 답을 내놓는데 회의 자리를 채우지도 않고 결과물에 대한 책임도 지지 않는다. 결국 회의실에서 질문을 받고 자료를 공유하며 설명해야 할 내가 주체가 되는 법. 그런 의미에서 마케팅팀 자료 분석 같은 경우는 내가 직접 했으니 팀원들에게 보다 상세한 설명을 제공할 수 있었다.
빈 문서를 열고 문자를 타이핑 하면 한 글자씩 기록이 되는데 손으로 메모를 쓰면 훨씬 느리지만 쓰는 동안 생각이 정리되는 편이다. 계산기나 엑셀의 숫자는 매우 정확하다. 내가 제대로 입력했다면 결과물도 정확할 수 밖에 없다. 종이에 숫자를 적고 계산을 하면 확실히 느리다. 결과값도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숫자의 크기를 제대로 체감할 수 있게 된다. AI 번역은 또 어떠한가. 직접 읽고 번역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단어와 문구, 문장들을 곱씹을수록 더 오래 남게 된다. 알고리즘이 추천한 음악은 편하긴 하지만 와닿지 않는 경우들이 있다. 돌고 돌아서 좋은 음악을 발견하는 순간 유레카를 외치게 된다.
AI는 명료하게 답을 선사해주지만 과정을 빼앗아버린다. 우리가 배우는 건 '답'이 아니라 '과정'인데 말이다. AI가 선사한 효율성은 '더 많이'를 가능하게 하지만 '더 깊이'를 보장하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같이 인공지능을 쓴다. 효율은 포기할 수 없는 부분이라서 말이다.
중요한건 AI가 만든 결과물이 정확하다는 가정이라도 반드시 사람이 확인을 해야 한다. AI가 분석한 인사이트 역시 100% 신뢰가 아니라 의심도 해가면서 다시 들여다 볼 줄 알아야한다. AI에 너무 의존하게 되면 회의실에서 나라는 존재도 크게 의미가 없다. 사람 대신 컴퓨터를 앉혀놓으면 되니까. AI가 데이터를 보면서 분석을 할 때 난 데이터 너머의 이슈들을 확인해야 한다. AI는 하나의 도구이고 어시스턴트의 역할을 한다. 사람이 주체가 되어야 한다. 그 순서는 확실히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