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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uisLee May 24. 2024

흥겨운 한식 파티

22일 차 :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에서 레온까지

2023.11.1 수요일

산티아고 순례길 22일 차


Mansilla de las Mulas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 ~ Leon 레온

19.32km / 4시간 52분 / 흐림




오늘은 드디어 순례길을 걸으며 친해진 몇몇 한국인들과 한식·삼겹살 파티를 하기로 한 날이다. 설렘과 기대감 때문인지 출발 준비를 하는 내내 평소보다 몸과 마음이 가벼웠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날씨가 하루 종일 흐렸다. 경로는 대체적으로 걷기 편했다. 중간중간 멋진 풍경들 덕에 지루할 틈이 없었다.



도시 외곽 언덕에서 저 멀리 레온이 내려다보이자 바닥나기 직전이던 체력이 충전되었다. 시내에서 KFC와 같은 글로벌 대기업의 간판도 오랜만에 볼 수 있었다. 국경일(모든 성자의 날)이라 닫아있어 들르지 못한 것이 아쉬웠으나 저녁 식사 파티가 예정된 덕분에 미련 없이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Leon(레온)의 모습


레온의 대표 관광지인 대성당 내부를 둘러보았다. 원래는 입장료를 지불해야 하는데 운 좋게 무료로 들어갔다. 순례길에서 크고 작은 여러 성당들을 구경한 탓에 큰 기대는 없었다. 그럼에도 웅장한 천장 높이와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인상적이었다.



성당 앞에서 파티 멤버들(장O님, 시O님, 보O님)을 만났다. 벤치에 앉아 대성당을 감상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끼어들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뒤에 앉아있던 스페인 현지인이 한국말로 대화에 합류해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국적인 외모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유창한 한국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한국에서 워킹 홀리데이를 하며 만난 한국인과 결혼해 고향 레온으로 함께 돌아와 살고 있단다. 한국말을 자주 사용하고 싶은데 부인은 스페인어를 선호해 기회가 많지 않다고 했다. 휴일에 바람 쐬러 잠시 나왔는데 마침 우릴 만나 반갑다며 레온에서 꼭 가 봐야 할 식당 몇 곳을 추천해 주었다. 정말 신기한 경험이었다. 순례길을 걸으며 음악과 드라마 등 한류 문화에 대한 관심 때문에 말을 걸어온 사람은 간혹 있었다. 그중에는 간단한 한국 인사말조차 할 줄 아는 이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우리말을 능숙하게 사용하는 외국인은 처음이었던지라 더욱 놀라웠다. 이름이라도 물어볼 걸 아쉬웠다.




미리 예약한 에어 비앤비 숙소에 짐을 풀고 장을 보러 갔다. 상점들이 대부분 닫은 탓에 삼겹살을 구할 수 없어 목살로 대신했다. 다양한 한식 재료들도 구매했다. 메인 셰프를 담당한 아내가 잡채를 만드는 동안 나는 올리브 오일, 소금, 후추에 목살을 재워두었다. 요리가 완성될 때쯤 미리 가열해 놓은 프라이팬에 고기를 올려 굽기 시작했다. 두께가 얇고 비계가 적어 한국에서 먹던 것에 비하면 부족했지만 상추에 싸 먹으니 절로 콧소리가 흘러나오면서 미간이 찌푸려졌다. 잡채는 재료가 부족하여 완벽하지 않았음에도 제일 먼저 접시가 비워졌다. 지구 반대편에서 잡채를 먹을 수 있을 거라고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기에 더 인기가 많았다. 며칠 굶은 사람들처럼 폭풍 흡입하며 첫 번째 코스를 마쳤다. 두 번째 메뉴는 닭볶음탕이었다. 원래는 찜닭을 만들 생각이었으나 아내가 남아있던 고추장을 이용해 중간에 변신시켰다. 닭볶음탕과 찜닭 사이 그 어딘가에 해당하는 음식이 완성되어 걱정이었다. 다행히 재료들이 신선하고 품질도 좋았기에 다들 게 눈 감추듯 했다. 닭도 어찌나 크고 육질이 부드러운지 가슴살이 전혀 퍽퍽하지 않았다. 1차로 먹은 잡채가 결코 적은 양이 아니었음에도 마지막 건더기 하나까지 말끔히 해치웠다. 아직 무언가 허전했다. 남은 닭볶음탕 국물로 라면을 끓여 거기에 계란과 밥을 넣은 라죽으로 대미를 장식했다.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었다. 곁들여 마신 소주는 요리들과 어우러져 맛을 북돋아주었다. 특히 청량하고 시원한 맥주에 소주의 묵직함이 더해진 소맥은 균형이 완벽했다.


20여 일의 순례길 여정 동안 가장 맛있고 즐거운 식사 시간이었다. 힘든 여정을 마치고 영어가 아닌 한국말만 쓸 수 있던 것 또한 우리에게 크나큰 심리적 안정감을 가져다주었다. 정신없이 식사를 하다 보니 스페인이 아니라 한국의 어느 식당에 온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처음 약속을 잡은 후 일주일간 오늘만을 기다렸는데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칠 정도로 기대 이상이었다. 순례길에서 우연히 만난 좋은 사람들 덕에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본 매거진은 저와 아내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 위해 생장 피에 드 포흐(Saint Jean Pied de Port)에 도착 한 날(23.10.10)부터 목적지인 피스테라(Fisterra)에 당도하기까지 40일 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직접 기록한 일기를 바탕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더 많은 사진은 @the_kangkang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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