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차 : 엘 부르고 라네로에서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까지
산티아고 순례길 21일 차
숙소에서 아침을 먹으며 다른 순례자들과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다. 스웨덴 출신 Fia(피아)는 버스를 타고 Leon(레온)으로 가는, 일명 점프를 한단다. 어젯밤 근심 가득한 얼굴로 걱정거리가 있다더니 밤사이 결정을 내렸나 보다. 남편이 손수 만들어준 가죽 신발을 신고 왔는데 비를 머금은 탓에 무거워졌고 발에도 맞지 않는다고 했다. 참고 계속 걸어야 할지 포기하고 돌아갈지 아니면 레온에서 신발을 새로 살지 머리가 복잡하다고 했다. 점프를 하는 이상 서로 일정이 어긋나 다시 만날 확률은 극히 낮아졌다.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눴다.
하루 종일 날씨가 흐렸다. 푸른 하늘과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없어 아쉬웠지만 구름이 뜨거운 햇빛을 가려 시원했다. 강한 역풍도 불지 않아 걷기에 이상적인 조건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묵묵히 나아갔다.
어제 카페에서 사진을 찍으며 친해진 스페인 순례자들과 하루 종일 길에서 마주쳤다. 만날 때마다 환한 미소로 인사를 건네며 긍정적인 에너지를 발산하는 유쾌한 사람들이다.
중간 마을에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지도 어플까지 동원해 식당과 카페들을 찾아다녔는데 전부 문이 닫혀있었다. 내일이 국경일(모든 성인의 날)이라 그런가 보다. 공휴일뿐 아니라 그 전날도 쉬는 이곳의 정서가 순례자 입장에서 반갑지 않다. 한 편으로는 스페인 사람들의 여유와 느긋함이 부럽다. 어렵게 영업 중인 알베르게 겸 카페를 찾아 들어갔다. 아내는 아메리카노, 나는 와인 한잔을 주문했다. 주인장이 서비스라며 chorizo(초리소, 훈연 소세지)와 올리브가 올라간 빵 한 조각을 내주었다. 예상치 못한 호의에 눈이 동그래져 감사 인사를 전하자 별거 아니라는 듯 미소로 답을 대신하고는 주방으로 사라졌다. 순례자들을 대하는 스페인 사람들의 따듯한 인심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오늘 걸은 거리가 길지 않은 탓에 도착지 마을인 Mansilla de las Mulas(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에서 약 6km 더 가면 나오는 Puente Villarente(뿌엔떼 비야렌떼)에서 묵을까도 잠시 고민했다. 그럴 경우 내일은 순례길 경로에서 만나는 몇 안 되는 대도시 중 하나인 레온까지 약 13km 남게 된다. 문제는 국경일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식당과 가게들이 닫는다는 것이다. 대도시라고 해서 예외가 없기 때문에 일찍 가 봐야 할 게 없다. 마침 이곳에 평점이 굉장히 높은 알베르게가 있어 멈추기로 했다.
알베르게는 수용 가능 인원이 많지 않아 미리 전화로 예약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우리가 마지막 남은 두 자리를 운 좋게 차지했단다. 사립 알베르게임에도 가격이 비싸지 않으면서(12€) 깨끗하고 시설도 좋았다. 주인 내외의 친절함까지 더해져 모든 게 만족스러웠다.
양고기를 구워 먹고 싶어 마트와 정육점을 돌아다녔으나 파는 곳이 없었다. 소고기 패티와 다른 재료들을 사서 햄버거를 만들어 먹었다.
식사를 하며 곁들인 와인 한 병으로는 부족해 바르를 찾아 나섰다. 역시나 내일이 국경일이라 연 곳이 거의 없었다.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영업 중인 곳을 겨우 발견하여 들어갔다. 출입문을 지나 주인이 서 있는 카운터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음식을 팔지 않는다며 나가라는 손짓을 해댔다. 저녁은 이미 먹었고 와인을 마시러 왔다는 설명을 하려는 찰나 누군가 우릴 부르는 소리가 나서 고개를 돌렸다. 유쾌한 스페인 순례자 Miguel(미겔)과 친구들이었다.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다가오더니 주인과 뭔가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탓에 잠자코 서 있었다. 기다리는 1초가 1시간으로 느껴지고 긴장감마저 들었다. 미겔이 이곳에 온 목적을 물어보았다. 자초지종을 들은 미겔이 다시 주인과 잠깐 얘기를 나누자 그제야 와인 잔 두 개를 꺼내어 채워준다. 미겔은 자신이 계산하겠다며 우리가 마다할 틈도 주지 않고 순식간에 값을 지불했다. 그는 같이 마시자며 가게 한쪽 구석에 있는 방으로 우릴 데리고 갔다. 당구대와 테이블 축구대가 놓여있는 공간에서 함께 놀며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었다. 나는 스페인어를 그 들은 영어를 거의 하지 못해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았음에도 흥겨운 분위기가 이어졌다. 아까 주인과 어떤 얘기를 나누었는지 물어보고 싶었으나 분위기를 망칠까봐 참았다. 좋은 기억만 남기고 싶기도 했고 염려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으리라 판단됐다. 분위기가 어느 정도 달아오르자 근처에 있는 다른 술집으로 자리를 옮겨 더 놀자고 했다. 지역에서 가장 맛있는 와인을 사주겠다며 우릴 유혹했다. Javier(하비에르)가 오늘을 끝으로 집에 돌아가는 바람에 작별인사 겸 마지막 파티도 할 거라고 했다. 시간이 너무 늦었고 내일도 걸어야 해서 미안하지만 함께 하지 못한다고 정중히 거절했다. 내일 길에서 만나기로 하고 웃으며 헤어졌다. 덕분에 하루를 행복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내일은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레온에서의 삼겹살 파티를 하는 날이다. 일주일 동안 열심히 걷게 만든 또 하나의 원동력이었다. 너무 설레고 기대된다.
본 매거진은 저와 아내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 위해 생장 피에 드 포흐(Saint Jean Pied de Port)에 도착 한 날(23.10.10)부터 목적지인 피스테라(Fisterra)에 당도하기까지 40일 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직접 기록한 일기를 바탕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더 많은 사진은 @the_kangkang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