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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uisLee May 17. 2024

자연 앞에 한 없이 나약한 인간

19일 차 : 레디고스에서 사아군까지

2023.10.29 일요일

산티아고 순례길 19일 차


Ledigos 레디고스 ~ Sahagun 사아군

15.9km / 4시간 23분 / 비


출발할 때 GPS 키는 것을 까먹은 탓에 실제 기록보다 짧게 나왔다.




아침부터 비가 쏟아졌다. 이제는 배낭 덮개와 우비를 입지 않으면 허전하다. 며칠 연속 비를 맞으며 걷다 보니 어느덧 익숙해졌나 보다.



순례길에서는 울퉁불퉁한 흙길 위를 걸어야 할 때가 많다. 비가 오면 곳곳에 물웅덩이가 생기고 땅도 질척댄다. 바지 밑단이 지저분해지고 신발 바닥에 진흙이 들러붙기도 한다. 어젯밤 확인해 보니 오늘 걸을 경로는 국도와 나란히 뻗어 있었다. 순례길의 바닥상태를 보고 여차하면 곧바로 옆에 있는 국도 위 갓길로 노선을 조정할 계획이었다.


마을을 벗어나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아니나 다를까 온통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아내에게 미리 알아본 정보와 계획한 대안을 설명해 주고 국도로 빠졌다. 신발과 옷가지가 더러워지는 걸 막을 수 있었다.



하루 종일 보슬비가 내리다 멎다를 반복했다. 비가 오는 둥 마는 둥 하면 우비를 입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매 순간 고민하게 된다. 올 거면 아예 시원하게 쏟아지는 이 차라리 마음 편하다. 적은 강수량 덕에 우비가 덮이지 않는 바지 밑단과 신발 안쪽이 젖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오늘은 짧게 걸은 덕에 12시가 조금 넘어서 목적지인 Sahagun(사아군)의 공립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시간이 일렀기에 다음 마을까지 더 갈 수 있었다. 아내가 며칠 전 물린 빈대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다. 옷가지 어딘가에 숨어있을지도 모르는 빈대를 박멸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고온의 열을 가하는 것뿐이다. 건조기에 넣고 돌려야 하는데 그동안 그런 시설을 갖춘 숙소가 없었다. 마침 이곳에 건조기가 있고 비구름이 걷힐 기미도 보이지 않아 멈추기로 했다.




체크인을 도와준 직원이 마을 축제가 열리니 가보라고 했다. 무료로 음식도 나눠준다고 귀띔해 주었다. 숙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축제 장소로 향했다. 농업 박람회가 열리고 있었다. 전시된 농기구들도 구경하고 지역 특산물 판매장을 돌며 하몽, 치즈, 올리브 등을 시식했다. 팸플릿에 따르면 알베르게 직원이 언급한 음식 나눔 행사는 오후 2시부터였다. 시간이 가까워지자 박람회장 한쪽 구석 대형 천막 앞에 긴 줄이 생겨났다. 조심스레 합류해서 마을 주민으로 보이는 앞사람에게 물어보니 우리가 생각하는 그 줄이 맞단다. 여러 번 배급받아도 되니 최대한 많이 먹고 가라는 말도 해주었다. 이윽고 커다란 들통 서너 개가 천막 안으로 들어갔고 입구가 열렸다. 메뉴는 병아리콩과 고기가 들어간 수프, 빵 그리고 와인이었다. 접시와 잔을 받아 들고 천막을 나와 바로 옆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생각보다 맛있었다. 순식간에 해치우고 다시 줄을 섰다. 그렇게 아내는 두 번, 나는 세 번을 먹었다. 운 좋게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었다. 숙소로 가려는데 아까 앞에 서있던 분과 마주쳤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배를 쓰다듬으며 자신은 두 접시를 먹었단다. 우리에게 몇 번 먹었냐고 묻길래 대답하자 엄지를 치켜세우며 Buen Camino(부엔 까미노, 좋은 길 되세요)를 외쳐준다.



숙소로 복귀해 아내의 옷가지들을 세탁기와 건조기에 넣고 돌렸다. 혹시라도 숨어있을 빈대들이 박멸되길 기원했다. 점심을 거하게 먹은 탓에 저녁은 간단히 해결했다. 옆에 앉아있던 다른 순례자 한 명이 맥주를 건네며 말을 걸어왔다. 나도 감자칩을 접시에 부어 내주었다. 그는 이번이 두 번째 순례길 방문이라고 한다. 직업 특성상 가을에만 긴 휴가를 쓸 수 있어 지난번에도 10월 초 출발했단다. 그때와 다르게 올해는 날씨가 너무 나빠 힘들다고 했다. 맑은 하늘과 아름다운 풍경 대신 매일 같이 쏟아지는 비와 거센 역풍에 질렸단다. 오늘을 마지막으로 여정을 접고 Leon(레온)을 거쳐 돌아갈 계획이라고 했다. 듣는 내내 진한 아쉬움이 전해졌다. 날씨라는 제어 불가능한 영역 앞에 무기력해지는 인간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새삼 깨달았다. 마음만 먹으면 매년 다시 순례길을 방문할 수 있다는 점은 한 편 부러웠다. 나는 15년 만에 어렵게 다시 찾았고 다음에 또 언제 기회가 될지 알 수 없다. 같은 상황이었으면 나 역시 포기할 확률이 높았을 것이다.


그래, 어쩐지 이상했다. 분명 한국을 떠나기 전 10월의 순례길 후기를 검색했을 때는 날씨가 좋지 않다는 이야기가 없었다. 우리가 날씨 운이 없는 편이긴 하다. 사주 풀이를 해보면 둘 다 물의 기운이 많다고 나온다. 어제까지 해가 쨍쨍하다가 외출이라도 할라 치면 어김없이 구름이 끼고 없던 우천 예보가 갑자기 뜬다. 장기간 비가 오지 않아 논밭이 메말라가는 지역을 방문하면 기우제라도 지낸 듯 가뭄이 해소되었다. 신혼여행으로 갔던 태국은 송끄란 축제 기간이었다. 이제는 받아들일 법도 한데 그럼에도 심드렁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침대에 누워 내일의 기상 예보를 검색해 보았다. 비 소식이 없다. 신난다. 불현듯 예전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분명 강수가 없다고 했는데 막상 다음날이 되면 거짓말처럼 소나기를 맞은 적이 여러 차례 있었다. 그냥 비가 올 거라고 생각하는 게 차라리 마음 편할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실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송끄란 축제 -  송끄란 축제 행사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물을 뿌리는 것이다. (중략) 축제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을 축복한다는 뜻으로 서로에게 물을 뿌리는 데 특히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높다. (중략) 송끄란 기간 동안 주요 도로는 교통이 통제되고 물싸움을 위한 경기장으로 사용된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송끄란 축제 [Songkran Festival]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본 매거진은 저와 아내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 위해 생장 피에 드 포흐(Saint Jean Pied de Port)에 도착 한 날(23.10.10)부터 목적지인 피스테라(Fisterra)에 당도하기까지 40일 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직접 기록한 일기를 바탕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더 많은 사진은 @the_kangkang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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