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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uisLee May 16. 2024

악천후의 연속

18일 차 : 까리온 데 로스 꼰데스에서 레디고스까지

2023.10.28 토요일

산티아고 순례길 18일 차


Carrion de los Condes 까리온 데 로스 꼰데스 ~ Ledigos 레디고스

23.81km / 6시간 35분 / 흐림, 비, 바람...



오늘은 출발지와 도착지 사이에 마을이 한 개 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17km를 가야 나왔다.


다행히 중간 8km쯤 작은 카페가 있어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허나 컨테이너로 지은 가건물에는 화장실도 없고 시설 또한 열악하여 비바람을 온전히 막아주지 못했다. 주변에 다른 상점이 없다 보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가격도 비쌌다.



오늘의 경로는 직선 구간이 많아 중간중간 스마트폰 어플로 길에서 벗어났는지 확인하지 않아도 되었다. 문제는 날씨였다. 강한 역풍으로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힘들게 한 걸음씩 내딛다 문득 하늘이 맑았더라면 어땠을까 상상해 보았다. 그늘을 만들어 줄 가로수가 없는 광활한 평야가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몇 시간 동안 뜨거운 직사광선을 받고 걸으면 온몸이 금세 땀으로 젖을 것이다. 흐린 하늘과 바람은 아름다운 풍경을 망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원망의 대상이었다. 잠깐의 상상 덕에 악천후는 오히려 그늘을 만들어주고 몸의 열기를 식혀주는 고마운 존재로 바뀌었다.


아침에 확인해 보니 어제 빨아 놓은 양말이 덜 말라있었다. 배낭 바깥에 양말을 걸고 커버를 씌웠다. 중간에 해가 비치면 벗겨서 건조할 계획이었다. 야속하게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날이 개는 것을 보고 커버를 제거하면 얼마 안 가 보슬비가 내렸다. 온종일 비가 오다 그치기를 반복하는 통에 나도 배낭 커버를 덮었다 걷었다 되풀이했다. 점점 성가시게 느껴졌다.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르자 포기하고 비와 상관없이 배낭을 덮고 가기로 했다. 양말은 숙소 침대 난간에 널어서 말리면 그만이다. 이후로 몸과 마음이 편해졌다.





앞만 보며 하염없이 걷다가 어느새 목적지인 Ledigos(레디고스)의 사립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프랑스 친구 한 명이 직장 때문에 오늘 아침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우리와 일정이 겹치며 같은 숙소에도 여러 번 묵은 탓에 자주 얘기를 나눴던 사이였다. 친근한 인상과 쾌활한 성격 탓에 가는 곳마다 분위기를 주도할 정도로 사교성이 좋았다. 작별인사를 하지 못하고 헤어진 게 아쉬울 만큼 어느새 정이 들어버렸나 보다.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되는 이 또한 순례길의 일부다. 미련 대신 새로운 인연을 기대하기로 한다.


오늘 숙소는 식당과 선술집을 겸하는 곳이다. 저녁 시간이 되자 동네 주민들이 하나 둘 들어와 북적이기 시작했다. 농사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기 전 잠시 들러서 목을 축이는 듯했다. 스페인에서 찾은 한 가지 신기한 점은 빈 의자가 있는데도 굳이 선채로 마시고 얘기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환갑이 훌쩍 넘어 보이는 분들도 한두 시간은 아무렇지 않게 서서 시간을 보낸다. 여행기를 작성하는 지금도 이유를 모르겠다.



식당에서 파는 메누 델 디아를 먹었는데 모든 게 만족스러웠다. 생수 1.5ℓ 그리고 와인 한 병을 동시에 받아보기는 처음이었다. 이 전에 갔던 곳들은 모두 둘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었다. 우리는 항상 와인을 골라왔고 대부분 각자 한 잔씩만 나왔다. 와인은 식사와 곁들였고 물은 내일 걸으며 마시려고 따로 챙겨두었다.


식사를 마치고 앉아서 쉬고 있는데 주인이 구석에 놓인 난로 위에서 밤을 구웠다. 눈이 마주치자 잠시 기다리라더니 접시에 잘 익은 밤 몇 알과 칼을 가져다주었다. 후한 인심과 센스에 놀라 연신 감사인사를 전했다.





다음 주 수요일 Leon(레온)에서의 삼겹살 파티 준비는 원활히 진행 중이다. 인원은 장O님, 시O님에서 한 분이 더 추가되었다. 아직 우리 부부는 만나지 못한 사람이다. 시O님에 따르면 어제 그분을 처음 만났고 한 두 마디 말을 나누자마자 잘 통하는 게 느껴져 지체 없이 초대했단다. 시O님이 워낙 믿음직했기에 어떤 분 일지 기대가 커졌다. 다들 오랜만에 영어 대신 한국어만 쓰며 저녁을 보내고 싶다는데 의견이 모아져 외국인은 초대하지 않기로 했다. 에어 비앤비로 주방, 화장실 2개, 방 3개가 있는 숙소의 예약과 결제를 진행했다. 



본 매거진은 저와 아내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 위해 생장 피에 드 포흐(Saint Jean Pied de Port)에 도착 한 날(23.10.10)부터 목적지인 피스테라(Fisterra)에 당도하기까지 40일 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직접 기록한 일기를 바탕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더 많은 사진은 @the_kangkang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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