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1 지옥을 탈출한 여자
“난 네가 여기 왜 있는지 모르겠다. 내 집에서 당장 꺼져.”
그가 나에게 경멸에 찬 눈빛으로 내쫓았다. 시간은 새벽 2시 30분. 그 순간 난 느꼈다. 우리 관계가 완전히 끝났다는걸. 난 꽤 재빠른 손놀림으로 폰과 지갑을 챙기고 집을 빠져나왔다.
1분 1초도 그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아서 신발도 안 신고 나왔다.
고민했다. 어떻게든 엘리베이터를 타서 경비실까지 뛰어가는 게 빠를까 아니면 옥상에 올라가서 문을 잠그고 경찰을 부르는 게 빠를까. 꼭대기 층에 살아서 옥상이 훨씬 가까웠다. 더 생각할 틈도 없이 옥상으로 뛰어 올라갔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옥상 문 앞에 있는 철조망(?)도 가지고 같이 올라왔다. 알 수 없는 쇳조각에 찍힌 발에서는 피가 줄줄 흘렀다. 하지만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가슴이 찢겨 나가는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장기간 불행에 중독돼 이게 얼마나 큰 불행인지도 모르는 사람처럼 멍해졌다. 사실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한다면 죽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항상 지옥에 갇힌 것처럼 답답하게 살아야 한다면. 제일 가까운 사람이 죽일 듯이 날 위협한다면. 사는 게 더 괴로울 수도 있겠다.
문을 잠그고 문고리를 철조망으로 돌돌 감았다. 새벽 3시의 차가운 공기에 손이 덜덜 떨렸다. 뜨거운 거라곤 눈에서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밖에 없었다. 이 비참한 순간에도 난 그저 살아남고 싶었다.
진짜 살고 싶었다. 이렇게 인생을 끝내는 건 억울했다. 후회했다. 작년에 이혼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텐데.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걸 수 천 번 깨달았으면서.
난 뭐가 무서워서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했을까. 죽음의 문 턱 앞에 서서야 가슴 사무치게 후회됐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다 112를 눌렀다. 순간 가족들과 친구들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누군가에게 전화하기에는 모두가 잠들고 있을 시간이고 딱히 전화할 곳도 없었다.
그리고... 이 상황을 지인들에게 설명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끔찍하다.
수화기 음이 두 번 정도 울리고. 덜컥. 전화를 받는 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라는 낮은 목소리에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들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말문이 막혔다. 이 상황에서 뭐라고 말해야 할까. 잠깐의 고민 끝에 내뱉었다.
“살려주세요. 저 좀 살려주세요...”
“여보세요?”
“저... 지금 옥상인데요... 술 취한 남편이 저를 때려서요...”
급박한 나머지. 인사도. 상황 설명도 없이. 그냥 말이 나오는 대로 내뱉었다. 생각을 정리해서 일목요연하게 말할 정신이 없었다. 그냥 이번 생에 내게 남은 기회가 있다면 누군가가 나를 살려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타자를 두드리는 소리가 났고. 짧고도 긴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주소 좀 불러주실 수 있나요?”
“주소요? 잠시만요.”
주소...여기가 어디더라.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 같았다. 마음을 진정시켜도 바로 떠오르지 않아 폰을 스피커폰으로 전환한 후 주소를 찾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긴장감에 손을 덜덜 떨렸다.
“비상아파트 710동 1510호요. 근데 지금 옥상이에요.”
“지금 바로 출동할게요.”
“저... 그 남자가 문을 부수고 들어오면 어떻게 하죠?”
긴박한 상황이었지만 목소리는 차분했다. 이렇게 급박한 상황에서 어떻게 이렇게 차분해질 수 있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가 약간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다 준비해서 갈게요. 최대한 입구 막아놓고 기다리세요.”
옥상 난간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서 밑을 내려다봤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는 손에 땀이 나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당장이라도 토할 거 같았다. 죽음의 문턱이 저기 있다. 난 어떻게 해야 할까. 어쩌다 난 이렇게 됐을까.
쿵. 옥상 문 앞에 있는 소화기로 문을 부수는 소리가 났다. 옥상 밖에서는 자다가 깬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상황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마라톤을 막 끝낸 것처럼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난 이미 망했다. 그냥 이대로 죽어도 상관없다. 하지만 저 새끼손에 죽을 순 없다. 문을 부수고 들어오면 그냥 뛰어내리자. 잠깐의 몇 초 동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옥상 문이 열리는 찰나 ‘뛰어내리세요!’라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환청인가 생각도 해봤지만. 환청이라기엔 너무 또렷했다.
저승에서 나를 부른 건지. 아니면 현생에서 나를 구해준 건지는 구분이 가지 않았다. 그런데 확실한 사실 하나는. 지금 뛰어내리면 이 지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는 거다.
죽든 살든 이제 저 새끼를 상대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밑을 내려다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 뛰어내리면 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라는 판단도 서지 않은 채 난 그냥 뛰어내렸다. 뛰어내리는 동안 심장 마비로 죽을지도 몰라. 아니야. 이번 생은 어차피 망했어.
몇 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뜨겁게 흘러내리는 눈물과 함께 경찰이 미리 깔아놓은 푹신한 에어 매트에 안착(?)했다. 낯선 얼굴들이 내게 괜찮냐고 물었다. 머리도 멍하고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오랫동안 체했던 가슴이 뻥 뚫리듯 가슴이 후련해졌다.
난 그날 옥상에서 떨어져 추락했고 가까스로 지옥에서 탈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