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2 지옥을 탈출한 여자
이게 무슨 냄새지? 진한 알코올향이 코끝을 강렬하게 찔렀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더니 뇌가 좌우로 흔들렸다. 팔에는 여러 개의 주사가 꽂혀 있고. 울고 있는 엄마가 내 손을 잡고 있다.
멍했다. 사실 지금이 무슨 상황인지도 잘 판단이 안 섰다. 옥상에서 뛰어내려 지옥에서 탈출한 게 진짜일까. 아니면 지금도 생생한 꿈을 꾸고 있을까.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엄마의 거친 손이 내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는 걸로 봐서는. 거친 질감이 너무 생생한 걸로 봐서는 이건 분명 현실이다.
“우리 딸 미안해...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살아 남아줘서 고마워.”
안경을 안 써서 잘 안 보이지만. 가족들이 내 곁을 지켜주고 있다. 안정감으로 가득 찬 특유의 느낌이 들었다. 드디어 벗어났다. 지옥에서 진짜 탈출했다는 안도감에 눈물이 줄줄 흘렀다. 흐느껴 우는 게 아니고. 그냥 눈물이 소리없이 줄줄 나왔다.
가족들이 나에게 그날의 정황을 물어볼 거라 예상했지만. 그 누구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어색하고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공기가 무거웠다.
하지만 나 역시도 할 말이 없었다. 사실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저... 화장실 좀 갔다 와도 될까요?”
상황을 파악하고 꺼낸 첫마디는... 화장실이었다. 내게 일어난 드라마틱한 현실 사이에서 빠져나오고 싶었다.
모두가 나를 걱정하고 있지만. 사실 아무도 내 마음을 모른다.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는데... 어색했다. 진짜 내가 살아남은 건지 아니면 죽었는데 영혼이 떠돌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는. 혼란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얼굴을 거울 가까이 들여다보니 외관상으로는 변한 게 없었다.
손목이 빨갛게 부었고 온몸이 뻐근한 것 빼고는 별다른 특이사항이 없었다. 뭐랄까. 그냥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잠깐의 시간이 지났을까. 의사가 간호사와 함께 병실에 등장했다. 이건 드라마에서만 봤던 장면이다. 의사는 내게 질문 세례(?)를 시작했다.
“신빛나씨. 정신이 드시나요? 아까의 상황이 생각나나요? 손목 말고는 다친 곳은 없나요?”
멍했다. 내가 괜찮은지도 사실 잘 모르겠다. 팔이랑 다리를 한 번씩 주물러봤다. 나 지금 괜찮은 건가? 어디가 부러진 게 아니라면 괜찮은 거겠지?
“괜찮은 것 같아요.”
물이랑 죽 말고는 아무것도 안 먹는데도. 계속 속이 메스껍고 구토가 나왔다. 과거의 악몽이 나를 공격하는 것 같았다. 그날뿐만 아니라 지옥에서 갇혔던 모든 날들이 흔적처럼 남아 나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의사와 간호사가 퇴장하자 나를 지옥에서 가까스로 구해 준 경찰이 찾아와 그날의 정황에 대해 물었다. 그가 나에게 궁금한 건 옥상에 올라가기 전까지의 상황이었다.
그런데 문득 진짜 내가 뛰어내린 게 맞나? 라는 궁금증이 들었다.
“근데 저 저 그 옥상에서 뛰어내린 게 맞나요? 이게 꿈인지 아닌지 헷갈려서요.”
경찰복을 입고 모자까지 야무지게 쓴 건장한 남자 두 명은 측은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잠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급박한 상황이었는데도 선생님이 저희 말을 잘 따라주셔서 안전하게 뛰어내릴 수 있었습니다. 새벽에 혼자 무서웠을 텐데 대응 잘했어요.”
다소 기계적인 말투지만 무사히 살아남아서 다행이라는 따뜻한 진심이 느껴졌다. 그들의 말을 직접 들으니 내가 겪은 모든 상황이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온몸에 소름이 돋고 싸늘한 느낌이 들었다.
“옥상에 올라가기 전에 그분이 선생님을 어떻게 위협했나요?”
나를 벼랑 끝으로 밀 듯 떠밀렸던 거 같은데. 이상하게 정확하게는 기억이 안 났다. 뭔가 그날 악마를 만나 시달린 듯한 느낌이랄까. 기억을 되짚어보니 쌍욕이 환청처럼 들렸다. 감히 입에 담기도 힘들만큼 상스러운... 그 단어들을 내뱉어야 한다는 게 괴로웠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방문을 발로 차고 들어와서는 저를 위협했어요. 시발년, 미친년 등 쌍욕 섞인 단어들로 어깨를 치고 손목을 부러뜨릴 것처럼 비틀고...그냥 쌍욕만 한 것 같아요.”
누가 들어도 이해가 안 될 만큼 이상한 상황이라는 건 알지만. 이것 말고는 더 정확하게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날 싸운 상태였는지 뭔가 일이 있었는지 추가 질문도 쏟아졌지만 사실 별다른 특이사항이 없었다.
“가정폭력은 언제부터 시작됐나요? 혹시 평소에도 폭력적인 성향이 보인 적이 있나요?”
‘가정폭력’이라는 단어가 가슴에 꽂혔다. 인정하기 싫지만. 이때까지 내가 그에게 당한 건...틀림없이 폭력이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나를 밀치고 위협하고 황당한 요구를 하고... 상식 밖의 일들의 반복.
“가정폭력이 시작된 건 결혼 초기부터였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소리 지르고 욕만 하다가... 몸을 밀치는 등 점점 강도가 심해졌던 것 같아요.”
그는 다양한 방식으로 나를 무너뜨렸다. 그냥 단순하게 이유 없이 화내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향수 취향, 속옷 취향들을 강요하는 것은 물론. 성관계를 할 때도 목을 조르거나 입술을 멍들게 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나를 괴롭혔다.
결혼 생활은 내게 먹기 싫은 음식을 매일 억지로 먹는 듯한. 역겨움의 연속이었다. 외롭고 비참했다. 사실 신혼여행을 갔을 때부터 결혼한 것을 후회했다. 특히 이유 없이 화를 내는 그를 볼 때면. 역한 느낌이 들었다.
“이전에도 술 먹고 폭력을 행사한 적이 있었나요?”
그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술을 과하게 먹었다. 취해서 몸을 제대로 못 가눌 정도로. 폭력적인 성향도 가끔 보였다. 하지만 그게 나를 향한 적은 없었다.
“술 먹고 저를 공격한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근데 마음속으로 벼르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와의 결혼 생활을 되새김질하면 눈물이 나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담담했다. 제3자의 입장에서 그 상황을 설명하듯.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달하듯. 그 누구보다 담담하게 지난 일들을 설명했다.
지옥에서 탈출했지만 마음 속엔 돌덩이가 앉아 있는 것처럼 무거웠다. 감정이 소화 안 되는 느낌이 바로 이런 걸까. 언제쯤 괜찮아질까. 언제쯤 원래의 나로 돌아올 수 있을까.
새하얗게 정돈된 병실에서 신경안정제를 맞으며 아무것도 없는 천장을 가만히 응시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평온함이었다. 눈을 뜨고 일어나도 아무도 날 위협하지 않는다... 정신병자와의 이별은... 꽤 짜릿했다. 감정이 없는 것 같은 공허함은 꽤 오래 갔다.
“그럼 저 무사히 이혼할 수 있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