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우울증이라고요?

ep03 지옥을 탈출한 여자

by 윤은빛

“그럼 저 무사히 이혼할 수 있는 거죠?”


이 물음은 마치 “악마와 직접 마주하지 않고도 이혼할 수 있나요?”와 같은 질문이었다. 그리고 지옥을 경험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 이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진심으로 궁금했다.


말끔한 인상의 정신과 의사는 안경을 한 번 고쳐 쓰고 날 쳐다봤다.


“사건 정황상 가정폭력으로 경찰에 신고돼서 여기까지 왔기 때문에... 변호사를 통해 이혼 절차가 진행될 겁니다.”


굉장히 정직하면서도 책을 읽는 듯한 또박또박한 말투로 내게 말했다. 곧이어 그를 더 이상 직접 상대할 일은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신빛나씨, 요즘 기분은 어떤가요?”


기분이 어떻냐는 질문에 당황했다. 악마를 벗어나 나를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사람은 없으니 예전과 비교하면 평온했다. 하지만 가슴 속에 돌덩이가 쿵 내려앉은 것처럼 감정이 체한 느낌이 들었다.


기쁨, 슬픔, 분노... 어떠한 감정도 없었다. 그냥 감정이 사라진 기분이었다. 햇빛이 쨍쨍한 낮에도 칠흙 같은 밤을 걷고 있는 기분을. 감히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감정이 없어진 거 같아요. 주변에 위협 요소가 없으니 평온한 것 같은데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불안하고 어지러운 느낌이에요.”


차분하게 말하다가 눈물이 핑 돌았다. 그리고 눈물은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렸다. 이상했다. 슬프다는 감정을

느낄 틈도 없이 그냥 눈물부터 나왔다.


의사는 내게 조용히 티슈를 건넸다. 티슈로 눈물샘을 막았지만 빠른 속도로 젖어갔다. 눈물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오랫동안 쌓여온 서러움이 폭발하는 것 같았다.


“가정폭력은 ‘안전하다는 감각’ 자체를 흔드는 경험이라서 당장 벗어난다고 해도 트라우마가 남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에요.”


그 일을 겪은 지 한 달이 다 지나가고 있는데 여전히 그날의 기억이 생생했다. 쇼츠를 계속 틀어놓은 것처럼 그 장면만 계속 떠올랐다. 나의 병명은 PTSD(외상후 스트레스장애)였다.


의사는 내게 지금 힘든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했다. 누구나 그런 일을 겪으면 잠도 잘 못 자고, 숨 막히는 기분에 기절할 것 같고, 우울한 상태가 지속되는 건 당연하다고 말했다.


“감정을 흘러 보내야 합니다. PTSD가 한 달 이상 지속되면 우울증으로 변합니다.”


그런데 이 기분이 지속되면 우울증으로 번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의사는 PTSD가 오래가지 않으려면 사건을 당한 날 잠을 자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난 그날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눈은 감았지만 정신은 계속 깨어있었다.


잠만 잘 잤으면 감정이 해소되고 일부 흐릿해질 수 있었다. 결혼해 많은 일이 있었지만 생생한 기억은 그날밖에 없다. 긴 영상을 봐도 하이라이트만 기억에 남는 것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그 장면만 강렬해졌다.


“결혼 생활은 어땠나요?”라고 묻는 의사의 말에. 난 잠시 머뭇거리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랑 사는 것 같았어요”라고 말했다.


순간 누군가에게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그간의 고통스러웠던 결혼 생활이 드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나에게 결혼생활이란 그랬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반복하는 일. 감옥에 갇힌 것처럼 언제 벗어날 수 있을까 상상하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의사는 참 안타깝다는 듯이 나를 바라봤다. 감정은 오래가지 않으니까 점점 괜찮아질 거라 날 위로했다. 문득 분노조절장애가 치료 가능한 병인지 궁금해졌다.


“분노조절장애를 치료할 수 있나요?”


“솔직히 정신과 의사로서 이렇게 말하면 좀 그렇지만... 저도 주변에 분노조절장애 환자가 있으면 되도록 피하려고 합니다. 통제 불가능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분노조절장애는 치료 불가능하다는 말씀이신가요?”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존감이 낮고 열등감이 심합니다. 이러한 성향은 대부분 어릴 때 형성되는데요. 자신이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경험의 부족으로 트라우마가 생긴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렇게 굳어진 것은... 근본적인 치료가 어렵습니다.”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화내서 당황한 적이 많았어요.”


“이 환자들이 작은 말에도 분노하는 이유는 자신이 무시당했다는 마음이 깔려 있기 때문인데요. 이런 사람들은 상대의 말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고요. 문장을 왜곡해서 해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대방은 공격할 의도가 없었는데 혼자 공격당한 거죠.”


“전 별 의도 없이 말했는데 갑자기 화낼 때가 많아서 힘들었어요. 뭔가 계속 그 속에 갇혀 있으면 숨 막혀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점점 피 말라가는 느낌이었어요.”


“냉정하게 말하면 분노조절장애는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만드는 무례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과 계속 소통하면 감정적으로 힘들어지죠. “내가 여기서 왜 이러고 있어야지?”라는 비참한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게 주변 사람들을 서서히 죽입니다.”


그가 나에게 했던 악마같은 소행들이 어느 정도 이해됐다. 그는 그냥 정신병자였다.


“어떻게 하면 이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정신없이 지내고 사람들을 만나서 웃고 떠들어도 아무리 노력해도 기분이 괜찮아지지 않아요.”


잘 지내는 것 같다가도 그 사람과 비슷한 실루엣을 보며 숨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한 번은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다가 정신을 잃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주저앉기도 했다.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불안감이었다. 이렇게 불안감이 지속된 적은 처음이었다. ‘이러다 죽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맥락 없이 눈물이 터졌다. 흐느껴 울지는 않았지만 가슴이 문드러지는 느낌이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줄어들지 않는 고통.


잠을 자면 괴물로 변한 그가 나를 쫓아오는 꿈을 꿨다. 새벽에 일어나 화장실에서 울고. 속이 안 좋을 때는 토하기도 했다. 지옥이라는 현실에서 벗어났지만 마음은 아직 지옥이었다.


의사는 나를 한참 바라보다가 이야기했다.


“문진표에 표시한 것을 보면 불안도가 굉장히 높은데요. 사실 해당 사건을 겪기 전부터 우울증이 있었을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근데 불안을 부추기는 대상이 이제 사라졌기 때문에 점점 괜찮아질 겁니다.”


난 이미 오래전부터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난 마음이 많이 다쳤고 곳곳에 생채기가 난 상태였다. 스스로가 너무 불쌍해 눈물이 나왔다.


늘 긍정적이고 밝았던 내가 항우울제를 먹고. 수면제가 없으면 잠을 잘 수 없는 삶이 시작됐다. 내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설명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냥 사고 같은 거였다. 예측 불가능한 교통사고. 그래도 살아야 했다.


“이렇게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버텨보세요. 확실한 건 점점 괜찮아질 겁니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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