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래포구역에서 배곧신도시 걷기
80년대 초 일것이다. 당시 수인선 협궤열차를 타고 수원에서 인천 송도를 갔다. 2~3량의 작은 열차이다.
중간에 기차서고 타고 내리는데 완전히 어디 논바닥이다.
시골 아낙네들이 수확한 푸성귀 등 농산물을 오일 장이나
시내에 팔러 가는 것이다. 돈을 마련해 가용이나 학자금에 보탰을 것이다. 꿰재재한 모습이다.
기계화 전이라 모든 것이 농민의 수고로움인 수작업이다 보니 힘은 들고 돈이 별로 안되었다. 농사 지어서는 가난의 대물림을 벗어날 수 없었다. 자식이 공부 열심히 해서 도시에서 살기를 바라는 부모의 바람은 거의 다 똑 같았다.
선생이나 면서기, 화이트칼라의 대표격인 은행원이 되는 것을 시골 부모들은 바랬다. 산업화 이전 60년대는 변변한 직장이 없었다.
인천 연수동으로 이사 온 것은 95년도 쯤이다. 서울 아파트가 재건축되면서 자녀들 학교와 직장(주안역 앞)관계로 인천으로 온 것이다. 서울에서 아는 분이 오면 맨날 가는 곳이 소래포, 연안부두 어시장이다. 손님들은 한번이지만 나는 자주 먹다보니 설사를 했다. 횟감이 자연산이 아니라 양식으로 남해안에서 올라온다는 사실을 안 것은 나중 일이다. 양식할 때 항생제를 섞어 사료로 쓴 것이다.
휴일 날 아이들 데리고 소래역에서 나중에 열차는 없어졌지만 협궤 철로를 건너 월곶으로 갔다. 넓은 바다와 항구, 어선을 보고 오면 마음이 더 넓어진 같은 어머니의 바다였다.
지금은 (하)인천역에서 지하로 수인선 전철로 갈아타면 연수동을 지난 소래포구에 갈 수 있다. 소래포구 역에서 걷기 시작하여 다리건너 월곶을 거쳐 배곧신도시까지 걸었다.
3시간반, 18,000보이다.
바닷가로 테마 공원화로 잘 정비되어 있다. 향후에 월곶-판교(월판선) 동서로 전차가 다니면 더 발전할 것이다. 배곧 서울대캠퍼스가 지지부진하다. 연구단지라 그런가?시화공단의 배후도시로 같이 잘 발전하면 좋겠다.
고등학교 동기에게서 전화가 왔다. 사전에 일 끝나면 전화하라고 했었다. 근처 시화공단에서 금속가공을 한다. 한번 보고 싶었다. 어떻게 사는 지.한가하다고 데리려 왔다.
공장을 견학했다. 한 때 20여명의 직원이 있었으나 지금은 아들 포함, 7명이다. 경기가 안 좋아 잔업이 없다보니 수입이 줄어 며칠 전 미얀마인이 2명이 자발적으로 나갔다고 한다.
경기가 안좋은 게 느껴진다. 공장가격도 폭락하고 거래도 안된다고 한다.
안산 그 집 근처에서 소주 한잔하는데 왼손이 불편하다. 보니
네 손가락이 잘려 뭉퉁하다. 젊은 시절 금속가공 시 프레스에 잘렸다고 한다. 가슴이 아팠다. 삶이 무언지 멍멍해서 술만 들이키다 영등포 집으로 왔다. 그 친구는 허리디스크 수술도 잘못되었는지 아직도 안좋다. 외제차 벤츠를 버리고 대중교통 이용하고 무조건 걸으라고 충고해 주었다. 배가 너무 많이 나왔다.
다음 날 시화공단 다녀왔다는 소식을 듣고 세무사 친구가 전화왔다. 잘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친구도 통풍에 전립선이 있어 지금 치료를 받고 있으나 힘들다고 한다.
70에 들어선 친구가 하나 늘었다. 질병이다.
걷는 것을 추천했다. 걸어야 산다. 걷지 않으면 죽음은 늘 가까이 있다. 가장 편안 운동, 지금 부터 무조건 걷는거다.
무릎이 괜찮다면 slow jogging을 추천한다.
지금 이 순간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이다.
시간내기 힘들면 수시로 서 있고 이동하는 것이다.
출근시 20분, 퇴근시 30분, 그리고 일하면 이동.
만보를 채우는 것이다.
그리고 여생을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기억하라.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
그래서 난 길에서 걸으면 살고 여생을 마치는 게 꿈이다.
길을 나서면 모두가 나를 반긴다.
혼자 걸으면서 또 다른 나와 대화를 시작한다.
온 천지 만물이 내게로 와서 인사한다.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