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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7 지긋지긋하다

 일요일 아침 열시, 바닐라 맛 마카롱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여덟 시 반에 깼지만, 최선을 다해 침대에서 몸을 떼지 않았다. 눈 뜨자마자 배가 고팠고, 요즘 난 너무 많이 먹었고, 좀 참아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먹을 것을, 단 것을 달라는 뇌의 명령에 순종하며 몸을 일으켰다.


 마카롱 하나로는 사흘 굶은 거지가 들어앉은 듯한 공복감을 채울 수 없었다. 시간을 벌기 위해 머리를 감고, 빨래하고, 내일 아침 챙겨갈 점심 도시락도 쌌다.


 열한 시 반. 참을 만큼 참은 내 안의 걸신에게 점심을 차려 바쳤다. 이번에는 알레르기 비염에 굴복당한 몸살 님을 보살펴야 한다. 설거지를 하고 침대에 누워 <그레이 아나토미>를 본다. 분명 한 상 가득 점심을 먹었는데도 어딘가 허전하다. 한참을 버티다가 다시 부엌으로 가서 마카롱 두 개를 더 먹었다. 이럴 것 같아서 설거지를 마치자마자 냉동실에서 미리 꺼내놨지롱. 먹기 좋게 녹은 마카롱을 먹고, 빈 플라스틱 통은 분리수거함에 넣고 시계를 본다. 간식 2회와 식사 1회를 마쳤는데 시계에 표시된 숫자는 14:02. 글을 좀 써볼까. 하나는 오늘 밤 열 시, 하나는 내일 밤 열한 시 마감인데. 몸살님이 쿡쿡 나를 찌른다. 이렇게 아픈데 앉아서 글을 쓰겠다고? 그래, 눕자.


 침대에 누워 다시 <그레이 아나토미>를 보다가 꾸벅꾸벅 졸았다. 곧 또 다시 뭔가 먹고 싶다는 생각에 슬그머니 스마트폰을 들어 배달의 민족 앱을 켠다. 앱 속에는 아는 맛과 알 것 같지만 정확하게는 모르는 맛의 디저트가 가득하다. 그 중 가게를 고르고 실패하지 않을 만한 메뉴를 고르고 배달가능금액을 맞춰서 주문하되 -요즘 돈을 너무 많이 썼으니까- ‘이 돈이면 차라리 치킨을 먹지’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만한, 너무 부담되지 않는 가격대로...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 때맞춰 귀찮음과 양심이 옆구리를 쿡쿡 찌른다. 요즘 의자에 앉을 때마다 배가 접히는 게 영 거슬려서 짜증내잖아. 어제 아침에 필라테스 갈 때도 새로 산 레깅스가 작아서 억지로 우겨넣고 이제 진짜 살 빼야겠다고 생각했잖아.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한숨 자기로 한다.


 오후 다섯시, 참지 못하고 일어나서 어제 잘라둔 멜론을 몇 조각 주워먹다가 결국 다시 밥을 차렸다. 저녁 설거지를 하기도 전에 요거트에 블루베리와 아몬드를 넣어서 또 간식을 먹었다. 설거지를 두 번 하려면 번거로우니까. 그래서 그런거지.


 온종일 뭔가를 먹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처음에는 스트레스로 인한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조금 지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다.


 요즘 나는 아무리 많이 먹어도 포만감을 느끼지 못한다. 원래 잘 먹는 편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건 상황에 따라 발동하는 초능력일 뿐, 기본적으로는 조금만 먹어도 금방 배가 불렀다. 배가 부르지 않아서 계속 먹은 것이 아니라, 배가 불러도 더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평소 식사량의 네다섯 배를 먹고도 배가 부르지 않다. 물리적으로 배가 묵직해지고 빵빵해진 느낌은 난다. 하지만 그게 전부다. 예전에는 지금 먹는 것의 1/3 정도 먹으면 목구멍까지 음식이 차서 더 먹기가 힘들었다. 배가 팽창해서 곧 찢어질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뇌는 이제 포만감이라는 것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 같다. 분명 있었는데 이제는 없다.


 일시적인 시스템 오류인 걸까. 사라진 것은 포만감뿐이 아니다.


 지지난 주에는 오븐 레인지에서 데운 빵을 꺼내다 열선에 손이 닿았다. 깜짝 놀라 차가운 물에 손을 식히긴 했지만, 그다지 아프지 않아서 상처가 크게 난 줄도 몰랐다. 화상을 입은 자리에 물집이 생긴 것도 몰랐다. 손을 씻다 물집이 터지고 뻥 뚫린 구멍을 보고서야 물집이 심하게 생겼었다는 것을 알았다. 많이 다쳤구나. 별로 아프지 않았는데. 손가락은 아직도 아물지 않아서 여전히 약을 먹고 병원에 다닌다.


 화상을 입은 다음 날에는 운동 시간에 늦을까 봐 서둘러 옷을 벗다가 맨투맨 안감에 양쪽 팔꿈치가 긁혔다. 조금 따갑다고만 생각했는데 심하게 쓸려 피부가 벗겨졌다. 양쪽 팔꿈치에서 일주일 동안 진물이 났다.


 배부름, 통증. 감각에 무뎌진 내가 낯설다. 최근 내 생활에 많은 변화가 있었으니, 몸과 마음이 조금 버벅거리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감각을 느낄 기운조차 없는 거겠지.


 그저 피곤하다. 모든 것이 지겹다. 주말마다 몸져눕는 것도 지겹고, 기운이 없어서 골골대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도 지겹고, 나조차도 읽기 싫은  글을 쓰느라 낑낑대는 것도 지겹다.


 그러니까. 이번 마감은 포기다. 어젯밤에 나는 마음속으로 선언했다.


 하루가 지난 오늘은 월요일. 나는 어제의 포기를 포기하고 또 이렇게 재미없는 글을 마무리한다. 포기도 못 하다니. 정말 지겹다. 오늘도 제시간에 출근해서 열심히 일하고 퇴근했다. 오전에는 이비인후과에 가서 진료를 받고, 퇴근 후에는 피부과에 가서 치료를 받았다. 하루 세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고, 영양제와 처방 약도 다 챙겨 먹었다. 몸의 감각도 잃어버리고 이렇게 또 하루를 잘 살아내는 내가 지긋지긋하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 자야겠다. 지긋지긋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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