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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 커피를 소화할 용기

 우리 회사에는 “먹는 사람들”과 “안 먹는 사람들”이 있다. “먹는 사람들”이란 무엇인가를 먹을 기회가 생겼을 때 적극적으로 자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다(대표님이 지은 별명이다). 음료수든 떡볶이든 치킨이든 족발이든 회든 그게 무엇이든 간에 “먹을 기회”가 있을 때 “저는 안 먹을래요”라는 말을 하지 않을 사람들, 여러 번 권하기 전에 이미 알아서 하던 일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음식이 놓인 테이블로 걸어올 것이라고 예상되는 사람들이다. 나는 “먹는 사람들”에 속한다.


 어릴 때는 밥을 잘 먹지 않아서 모두가 걱정했다고 한다. 그러다 외할머니가 지어다 주신 보약을 먹은 후부터 밥을 잘 먹게 되었다. 이제 그만 먹으라고 말려도 울고불고 떼를 써서 엄마는 한동안 힘들었다고 한다. 할머니의 보약 덕분인지 나는 어린이일 때부터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잘 먹었다. 먼지와 꽃가루 알레르기는 있었지만, 음식과 관련된 알레르기는 없었다. 통닭을 먹을 때면 살점을 꼼꼼하게 발라먹고 깨끗한 뼈만 남겨서 칭찬을 받는 어린이였다. 밥그릇에 밥풀을 한 톨도 남기지 않고 잘 먹는 것은 그 시절 어린이의 미덕이었고, 어릴 때부터 잔병치레가 많고 몸이 약했던 내가 유일하게 내세울 수 있는 “건강함”의 증거이기도 했기에 더욱 잘 먹는 것에 힘썼다.


 “먹는 사람”으로 자랄 수 있었던 이유는 먹는 것을 좋아하고 호기심이 많기 때문이다. (식탐은 덤이다.) 딱히 승부욕도 야심도 없는 사람이지만, 남은 삶에 대한 유일한 포부는 가능한 한 많은 것을 맛보고 싶다는 것이다. 먹는 얘기만으로 책 한 권도 쓸 수 있을 것 같다. 좋아했으나 사라진 맛집들, 선호하는 탄산수의 취향, 치킨을 먹을 때 선호하는 부위의 순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자주 먹을 수 없는 장어구이, 관악구의 마카롱에 대하여, 동네의 여러 꿔바로우에 대해(꿔바로우를 파는 여러 가게 중 어느 집의 것이 바삭하며 어느 집이 쫀득한지, 다음 날 데워먹어도 딱딱하지 않은 건 어느 집인지, 건두부 볶음을 서비스로 주는 집은 어딘지), 좋아하는 떡볶이에 관해(매운맛과 단맛의 밸런스, 밀떡보단 쌀떡), 올봄부터 쭉 사랑에 빠져있는 에어 프라이어로 구운 머시마루 버섯과 영양 부추 부침 등등....... 딱히 아무도 궁금해할 것 같지 않아서 쓰지 않은 많은 이야기가 있다.


  이런 내가 먹을 것 앞에서 말문이 막히고 동공이 흔들리는 순간이 있다. 선택권 없이 내 몫으로 정해진 커피를 건네받는 순간이다. 예를 들어, 대표님의 손님이 직원 수에 딱 맞춰 사 오신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것. 책상을 각기 다른 톤의 핑크색 물건으로 가득 채운 핑크 덕후, 매일 콜라 한 잔과 오뜨 한 개를 먹어야만 하는 사람(오뜨가 안정적으로 공급되지 않으면 간식 담당 직원 컴퓨터의 배경화면을 오뜨로 바꾸며 심술을 부린다), 문장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단어의 나열만으로 업무 지시를 하는 사람, 대표님의 도시락을 몰래 훔쳐먹는 사람 등등 여러 종류의 이상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회사이지만,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마실 커피 중독자는 없기에 나는 내 몫의 커피를 어떻게든 스스로 해결해야만 한다.


 나는 커피에 민감한 장을 가지고 있다. 커피를 마시면 배가 꾸룩거린다. 곧이어 속 쓰림과 함께 배가 싸하게 아프기 시작한다.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는 한 두 시간 내에 혈색을 잃은 창백한 얼굴로 배를 부여잡고 화장실에 간다. 장운동이 민감한 시기에는 일주일, 열흘 동안 배가 꾸룩거리고 장이 꼬이기도 한다. 창백해지는 날이 늘어나는 만큼 점점 더 커피를 마시는 일이 두려워진다.


 처음에는 (그 시기가 언제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이렇지 않았다. 컨디션이 안 좋은 날에만 조금 속이 쓰리거나, 순간적으로 배가 조금 부글거리고 마는 정도였다. 구남친들과 삼청동 커피 방앗간의 구석진 다락방 자리에 몸을 구겨 넣고 예가체프 핸드드립 커피를 음미하던 시절이 있었으니 말이다. 커피가 단지 수많은 음료 중 하나에 불과했던 시절이었다. 2011년의 어느 날까지는 커피를 마시기로 결정하는 것에 큰 용기가 필요하지 않았다.


 문래동 홈플러스 2층의 커피숍 앞에서, 친구가 오기를 기다리며 커피를 주문할지 말지 치열하게 고민하던 2011년 겨울의 기억이 있다. 카페 모카를 마시고 싶었지만, 곧 다가올 한두 시간 후 미래의 나를 상상하며 깊은 고민에 빠져있었다.


 몸의 변화는 찰나에 일어나지 않는다. 변화를 깨닫게 되는 건 이미 변화의 과정을 지나고 난 후의 일이다. 어떠한 계기로 변화가 시작되고 진행되다가 이전과 다른 차원의 단계에 도달한다. 그 시점이 지나고 난 후에야 변화를 실감하게 된다. 커피와 멀어지게 된 변화의 시작은 언제였는지 모르지만, 2011년의 겨울은 내가 확실하게 변화를 실감한 시기였다.


 그 뒤로 9년이 지난 지금의 커피는 그때보다 더 큰 존재감을 갖게 되었다. 커피를 마시려면 찰나의 바디 스캔을 통해 몸 상태를 살피고 미래의 내 모습을 그려보며, 당장의 만족감과 미래의 고통을 저울질한 후 커피에 대한 의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앞으로 일어날 어떤 일도 감수하기로 다짐을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예전에는 사소한 결정일 수 있었던 것이 이제는 결심해야만 할 수 있는 일이 되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커피를 권한다면, 그 사람은 나와 친하지 않거나 나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이거나 알게 된 지 얼마 안 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회사의 커피메이커 담당인 동갑내기 직원은 내가 커피를 못 마신다는 것을 안다. 과장님은 모른다. 알게 된지 2년이 안 된 친구 영은,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스터디를 할 때면 내 몫의 방탄 커피를 챙겨오거나, 편의점에서 2+1 하는 커피를 사 와 건네곤 했다. 카페에서 커피를 권하고, 커피를 못 마신다고 대답하는 상황은 각자 다른 이유로 당황하는 당황x당황의 순간들이었다. 내 당황의 이유는 알지만, 상대방들이 당황하는 이유가 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당황x당황 혹은 당혹x당혹의 순간들은 여전히 익숙하지 않다.


 상대와의 관계가 어떻든 내가 뭔가를 소화할 수 없다는 사실과 그 사실을 말하는 것은 왠지 서럽다. 나는 “먹는 사람”이라 먹고 싶은 것도 많고 대부분을 잘 먹어왔는데. 가리는 것 없이 “뭐든 잘 먹는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이 익숙한 삶을 살아왔는데, 이젠 커피라는 세계의 입구에서 부적격 판정을 받고 검색대를 통과하지 못하는 기분이다. 같이 간 사람은 들어갈 수 있는데, 나는 갈 수가 없다. 의지대로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은 짜증 나는 일이다. 그것도 나만!


 내가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는 건, 고달픔을 감수하고서라도 새로운 경험을 하기로 했다는 뜻이다. 위장 상태가 흔하지 않게 매우 훌륭하여 ‘오늘 커피를 마시면 꾸룩거림 최대 3시간’ 정도로 예상되는 날이거나, 다양한 원두를 취급하고 직접 로스팅하는 카페이면서 맛있는 커피를 맛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주는 경우에 가능하다. 가장 최근에 커피를 마신 것은 친구와 양평 여행을 다녀온 설 연휴였다. 여행 중 두물머리에서 커피 체험이 가능하며, 직접 만든 연잎 아이스크림을 판다고 쓰여있는 카페를 발견했다. 카페에 들어간 가장 큰 이유는 물론 아이스크림 때문이었다. (수제 아이스크림을 보고 그냥 지나친다면 몸이든 마음이든 어디가 많이 아픈 상황이다. 다행히 그날 나는 좀 피곤하긴 했으나 아주 건강했다.) 아이스크림이 아주 맛있었고, 직접 커피나무를 키우고 커피 체험도 진행한다는 점에서 사장님의 전문성에 믿음이 갔다. 카페에서 파는 두 종류의 드립백을 한 세트씩 사서 친구와 나누었다. 여행에서 돌아와서 설 연휴의 어느 아침에 커피를 마셨다. 아이스크림만큼 훌륭하지는 않았지만 오랜만에 맛보는 커피의 맛과 향이 좋았다.


 일 년에 한두 번쯤 아주 조심스럽게, 최대치의 용기를 내서 커피를 마신다. 원두의 종류, 만든 사람의 솜씨와 과정에 따라 다른 맛과 향을 뿜어내는 커피라는 매력적인 세계를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다. “먹는 사람”으로서 최대한 세상의 많은 것을 맛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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