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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 귀여워하는 마음

 귀여운 것을 좋아한다. 사람도, 물건도 마찬가지다. 예쁘고 멋지고 잘생긴 것보다 귀여운 게 최고다. 귀여움을 넘어설 수 있는 매력은 없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귀엽다는 말을 제법 많이 들었다. 어릴 때는 더 자주 듣는 말이었고, 특히 연애 중일 때는 더욱더 쉽게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결혼으로 인한 6년간의 연애 공백 탓에 귀엽다는 말을 해줄 만한 연인이나 썸남은 씨가 말랐다. 올해 서른일곱 살이 되고 보니 귀엽다는 말을 듣기는 더 어려워졌다.


 여자들에게서 “귀엽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병원 간호사가 건네는 “오늘은 목에 손수건 안 하고 오셨네요? 너무 귀여워서 기억하고 있어요.” 라거나 회사 동료에게서 듣는 “오늘 상해씨 너무 귀여워요.” 라거나. 내 소지품을 보며 “도대체 그런 건 어디서 사냐”며 “어쩜 자기 같은 것만 갖고 다닌다니까” 라는 말도 일부 내 귀여움을 인정하는 말로 친다면 남자들에게도 가끔은 듣고 있다. 예전만큼은 못하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아직은 귀여움과 밀접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다.


 주변 사람들에게서 귀엽다는 말은 듣는 이유는 주로 내 외모 때문이다. 크고 동그란 눈 (왜 그렇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냐는 말을 많이 듣는 걸 보면 확실히 내 눈이 동그랗긴 한 것 같다. 눈은 원래 세모나 네모이기 힘들고 동그란 것이 당연하지 않나 늘 의아하긴 하지만, 이제는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동글동글한 콧방울 (엄마는 내 코가 복코라고 했지만 웃을 때 코가 커지는게 싫어서 꽤 오랫동안 컴플렉스였다), 도무지 빠지지 않는 볼살과 작은 입, 동그란 얼굴. 적당히 둥글둥글한 친근한 몸매와 평균에 속하는 160cm의 키. 소름 끼치게 예쁘거나 코피가 팡 터질 만큼 섹시하지 않고, 시크한 도시 여자 이미지도 아니다. 귀엽다는 말은 귀여운(?) 외모에 귀여운 물건들을 잔뜩 가지고 다니는 내게 가장 적절한 표현 같다.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익숙하고 여전히 들으면 기분이 좋다.


 내게 귀여움이란 사랑의 시작이다. 상대가 물건이든, 사람이든. 그 감정이 인류애이든, 우정이든, 이성으로서의 사랑이든 간에 말이다. 사랑은 그렇게 사소하고 따끈한 마음 같다.


 누군가가 나를 귀여워한다고 느끼면 안절부절못하게 된다. 귀여워하는 마음은 말뿐 아니라 눈으로도 표정으로도 전해진다. 애정이 어린 눈빛과 미소가 담긴 관심을 받으면 기분이 좋으면서 동시에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이 든다. 나 역시 그 사람의 귀여움을 많이 발견했다면 상황은 심각해진다.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내가 사랑에 빠지는 과정은 대체로 이렇다.


 내가 귀여워?

 나도 네가 귀여운데?

 그럼 우리 본격적으로 서로를 귀여워해 볼래?


 내가 가진 가장 큰 재능은 귀여움을 발견하는 것이고, 삼십 년을 넘게 살아보니 이 세상에 귀여운 구석 하나 없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언제든 사랑에 빠질 준비가 되어있던 셈이었고, 나를 귀여워하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연인이 된다는 것은 서로에게 마음껏 귀엽다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는 암묵적 합의 같다. 나에게 사랑이란 누군가를 귀여워하고, 귀여움받고 싶은 마음이다. “귀여워!”라는 반응은 생각이나 판단할 여유도 없이 튀어나온다. 귀여움은 순간적으로 사람을 무장해제 시키는 마법이다. 서툴고 못난 모습도 사랑스러워 보이게 만드는 한없이 너그러운 마음. 그 앞에서는 어떤 것도 숨길 필요가 없다.


 덕후를 좋아한다. 덕후는 뭔가를 아주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다. 너무 많이 좋아하는 뜨거운 마음이 남들에게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가끔 이상하게 보이는 사람이다.


 사랑을 담은 눈길로 누군가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 좋아하는 대상을 생각하며 설레할 수 있는 사람.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좋다. 좋아하는 마음을 투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갈수록 용기가 필요한 일이니 더욱 소중하다.


 “귀여워!”(=“널 좋아해!”)라고 눈빛으로 표정으로 손길로, 온몸과 마음으로 표현하는 사람이 좋다. 큰 목소리로 말하지 않아도 좋다. 미소가 번지며 살짝 올라가는 입꼬리, 조용히 반짝이는 눈처럼 소리 없이 마음이 드러나는 순간. 매일을 살아내기 위해 덧쓰고 있던 표정이 순간 녹아 없어지고 숨겨진 미소가 피어난다.


 내가 이상한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귀여워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귀여워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너무 귀엽다. 때론 터져 나오고 때론 스며 나오는 순도 높은 행복. 그런 행복의 씨앗을 품고 사는 사람을 보면 “귀여워!!” 라고 소리치고 싶어진다.


 나는 요즘 그런 특별한 귀여움이 필요하다. 귀여운 사람을 귀여워해 주고 싶고, 그 귀여운 사람이 나를 귀여워해 줬으면 좋겠다.


 그런 모습을 꿈꾸며 결혼 생활을 시작했었다. 따뜻한 눈빛 속에 서로를 담는 일상을 그렸다. 어긋나는 시선과 이해할 수 없는 일들 속에 매일을 바둥대다 보니 어느 순간 거짓 웃음을 짓는 것조차 지쳐버린, 누군지도 모를 한 사람이 남아있었다. 자신의 힘으로 모든 걸 이겨낸 씩씩한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제대로 실패했다.


 이겨낼 수도 없고 굳이 이겨낼 필요도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다시 나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이 있었다. 늘 씩씩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버리는 것, 자신을 탓하지 않고 오늘의 고단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미성숙함의 증거가 아니고, 내가 사랑받지 못한 것은 내 책임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이제야 나는 나를 조금 귀여워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서툴고 모자란 모습을 견디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으이그~” 하며 따뜻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으니 괜찮다.


 마음껏 약해져도 괜찮은 사람. 안심하고 안길 수 있는 사람. 상대의 예쁘고 귀여운 구석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랑할 능력을 갖춘 사람. 그런 사람이 되어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혹은 그런 사람을 만나 그런 사람이 되는 것도 좋다.


 요즘 가장 필요한 건 바로 귀여워하는 마음이다. 복숭아 모자를 쓴 펭수를 보며 귀엽다고 소리를 지르고, 맛있는 음식 앞에서 다리를 떨고, 개와 고양이를, 온갖 귀여운 것들을 열과 성을 다해 귀여워하는 나를 귀여워해 줄 누군가를 기다린다. 내게 몰입하고 애정을 쏟아줄 이상한 “이상해 덕후”를. 나도 덕질이라면 꿀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


 우리, 본격적으로 서로를 귀여워해 보면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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