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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 상해씨는 표정이 없잖아

 작년 여름 쯤이었다. 입사한지 2~3개월이 지난 때였으니까 그쯤일 것이다. 상황은 기억나지 않는다. 어떤 이야기를 하다가 그런 말이 나왔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다른 사실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흐릿하다. 오직 과장님의 한 마디만 선명하게 기억에 남았다.


 상해씨는 표정이 없잖아.


 이 글을 시작하면서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표정”을 검색했다. 
마음 속에 품은 감정이나 정서 따위의 심리 상태가 겉으로 드러남. 또는 그런 모습.

 “표정”의 뜻을 찾아본 것은 처음이다. 당연히 아는 단어라고 생각했다. 만약 사전을 찾아보기 전에 누군가(1)가 “표정”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면 뭐라고 대답했을지 잠시 상상해본다. ....... 표정이란... 얼굴에 나타나는 건데... 표정을 보면... 버벅거리는 내 모습이  그려진다.


 표정이 없다는 말을 듣고 내 기분은 이랬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겨울왕국의 엘사가 불곰의 앞발을 꽁꽁 얼려버렸다. 불곰의 커다란 앞발이 투명하고 두툼한 얼음 속에 들어있다. 오로지 한 쪽 앞발만이다. (역시 이유는 모르겠지만) 불곰은 최대치의 분노를 담아 풀스윙으로 내 뺨을 후려친다. 그 정도면 손을 감싼 얼음이 깨질만도 한데, 어찌나 단단한지 조금도 깨지지 않았다. 깨진 건 내 뺨 뿐이다. 목이 180도 넘게 돌아간다. 몸을 휘청이다 바닥에 쓰러진다.


 너무 아프다. 이어서 황당 x 당혹. 아 씨발 이거 뭐지. 머릿속이 하얘져서 누구에게 화를 낼지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얻어맞은 뺨이 쓰라리고 뜨겁다. 한 쪽 뺨이 빨갛게 부은 얼빠진 얼굴로 눈물을 줄줄 흘린다. “당했다”는 생각에 화도 나지만 동시에 수치스럽다. 어쩌면 내가 뭔가 잘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나와 불곰과 엘사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빠르게 떠올려 본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표정은 내가 짓는 것이기도 하지만 ‘상대방이 보는’ 것이다. 네이버 국어사전도 “겉으로 드러남”이라고 정의하지 않았던가. 화살은 시위를 떠났다. 본 사람의 해석을 거치는 순간 내 역할은 끝났다. 이제 표정에 대한 주체적인 권리는 상대에게 있다. 내 설명은 참고자료 일뿐, 받아들일지 말지도 상대가 정한다.


 억울하고 속상했지만 나는 “이상해 표정”의 전 소유주로서 더 이상 발언할 자격이 없었다. 누군가 다른 의견을 내주길 기대했지만 긍정하는 사람도 부정하는 사람도 없었다. 이제 진짜로 뭔가를 잃은 기분이었다.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표정에 그대로 드러낸다고 엄마에게 자주 야단을 맞았다. 초등학교 3~4학년때의 일이다. 자꾸 듣다보니 반항하고 싶어졌다. 가족들과 있을 때는 최선을 다해 무표정을 유지했다. (2)


 네이버 사전에 따르면 엄마의 말은 비문이다. 표정이란 원래 감정이 드러나는 것이다. 엄마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기분 나쁠 때도 아닌 것처럼 표정 관리를 하라는 것이었지만, 사회인으로서 마땅히 갖추어야 할 소양이란 점을 강조하고, 발언에 권위와 타당성을 더하기 위해서 “표정에 감정을 드러내선 안된다”고 표현한 것 같다. 어린 시절로 돌아가 엄마에게 짙은 파란색 표지에 비닐 커버가 씌워진 두툼한 사전을 펼쳐 표정의 정의를 읽어주고 싶다. 아마 그럼 몇 시간 동안 꼼짝없이 엄마의 분노를 온몸으로 맞아가며 “넌 나를 엄마 취급도 안해. 넌 나를 무시하는 게 분명해.”라는 결론에 향해 달려가는 엄마를 견뎌야했겠지만. 조금은 후련했을 것이다.


 상대가 가족이 아니라면 나는 잘 웃고 리액션이 좋은 사람이다. 고등학교 때는 매일 밤 끊이지 않고 전화가 걸려왔다. 충전기를 연결한 채로 전화를 받다보면 크롬 컬러의 걸리버 PCS폰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달궈진 폰에 데이지 않으려고 폰을 귀에서 살짝 뗀 채로 통화를 했다. 크게 웃는 내 모습은 사랑받는 이유이자 증거였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더 자유롭게 감정을 드러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고도 사랑받을 수 있었다.


 “표정이 없다”는 과장님의 말은 나의 초라한 현재를 까발리고 있었다. 2019년 여름의 나는 아직 새 회사에 적응하지 못했고, 사람들 속에서도 늘 혼자라고 느꼈다. 입사 일주일만에 한 명의 사원이 퇴사했다. 한동안 나는 회사 내의 유일한 사원으로 실장님, 팀장님, 때로 과장님의 업무 지시를 받으며 일을 했다. 점심에는 아무리 애를 써도 밥이 넘어가지 않아 제대로 밥을 먹지 못했다. 설게 담긴 공깃밥을 절반은 커녕 1/3도 비우지 못했다. 당장은 괜찮아도 한두 시간만 지나면 허기가 졌기 때문에 최대한 더 먹어보려고 했지만 넘어가질 않았다. 내가 너무 적게 먹는 것을 알고 팀장님은 종종 내 밥그릇을 확인하곤 했다. "설마 다 먹은 거야?” “밥을 먹긴 먹은거야?” 그런 말을 듣기 싫어서 더 이상 밥을 넘길 수 없으면 조용히 밥그릇 뚜껑을 덮어 가렸다. 퇴근하고 오면 밥맛이 없어 먹지도 않고 누웠다. 운동을 하지 않고 몸무게가 5kg 넘게 빠졌다.


 스스로 표정을 지워버릴 때가 있다. 어떤 감정도 드러낼 용기가 없을만큼 약해진, 살기 위해 의연함을 연기해야 하는 시기이다. 섣불리 표정을 드러냈다가 상대의 사소한 말에도 무너질 수 있을만큼 위태로운 상태. 최대한 나를 작게 만들어 무표정 뒤에 숨어야만 겨우 일상을 살아갈 수 있다.


 무표정은 때로 가장 절실한 구조요청이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해. 하지만 그걸 구걸하고 싶진 않아. 약해진 나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섬세하게 다뤄줄 수 있는 사람만이 내 구조요청을 알아봐주었으면. 그런 일은 기적에 가깝다는 걸 알면서도 매일 기적을 바라는 나날. 지난 여름의 나는 그런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외로웠지만 외로움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여러 명의 상사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끌려다녔지만 남들 눈에는 노련해 보이기를 바랐다. 무표정을 연기하던 나의 약하고 초라한 면면이 과장님의 한 마디에 그대로 까발려진 것 같았다.


 “상해씨가 없으니까 사무실이 너무 조용하던데.” .
 ...?? 
 “상해씨가 제일 먼저 웃잖아. 웃음소리도 제일 크고. 그럼 그 다음에 다른 사람들이 따라 웃고 그러잖아.” 
계절이 한두 번쯤 바뀌어 가을 아니면 겨울. 연차를 쓴 다음 날 팀장님과의 대화다.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 사랑받고 싶다는 욕구는 자꾸 마음을 일렁이게 한다. 타인의 눈으로 나를 보고, 그들의 말로 나를 지적하는 일. 가끔은 필요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너무 과해서 피로해진다.


 사람들의 평가를 그러모아 내 모습을 그려본다. 사실의 합이 진실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더욱이 그게 한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면.  


 2019년 여름의 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2020년 여름,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나는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늘 하던 생각을 잠시 미뤄두고 오래된 친구를 대하듯 나를 바라본다. 사랑과 우정을 담아서, 익숙하지만 가끔은 낯설게. 이전에 없었거나 모르고 있던 모습을 새롭게 발견하는 순간을 기꺼이 맞이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작은 변화는 흥미롭고 그 자체로 소중하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상해”의 최신 정보를 업데이트 한다. 언제 어떤 표정을 보여도 괜찮은 친구가 되고 싶어서. 너무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줄 다정한 친구가 되고 싶어서.



(1) 예를 들어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조카들

(2) 사실은 최선을 다할 필요도 없었다. 웃을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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