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인연의 순기능
앞서 언급했던 A회사의 첫 상사, 그녀와의 첫 만남은 이랬다.
"안녕, 나는 소피아라고 해."
나보다 열 살쯤 많은 그녀는, 날 처음 만난 날 자기소개를 저렇게 명랑하게 했었다.(지난 사회생활을 돌아보면 윗사람에게 자기소개를 들은 기억조차 드문 데다가, 위계질서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녀의 태도에 나는 기함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첫인상대로 남다른 사람이었다.
누구나 화를 낼만한 상황에 혼자 긍정언어를 사용하여 상황과 상대를 무력화시켰고(화도 부딪혀야 소리가 나는데 부딪힐 사람이 없으니 사라질 수밖에), 사람을 항상 좋은 쪽으로만 보며 칭찬에 관대한 사람이었고, 모르는 것에 대한 숨김이 없었다. 그녀는 아랫사람에게 모르는 것이 들킬까 되레 화를 내거나 부러 아는 체하지도 않았고, 그들에게 배울 점이 있다면 기꺼이 배우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일하러 만난 사이에서 사람만 좋은 건 능사가 아니지 않나. 나는 그녀의 무던한 성격처럼 일 처리는 두루뭉술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그녀는 업무에 대해서는 뾰족한 무언가가 있었다. 예민하지 않지만 예리한 사람.
그렇게 나는 다시 취업한 직장에서 좋은 상사이자 좋은 인연을 만나 퇴사한 지금까지 종종 연락하고, 종종 만나 밥을 먹는 사이가 되었다.
특이한 점은 그녀는 알면 알수록 예상 밖의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도덕적으로 완벽하게 선하거나 바른생활 인물이 절대 아니었다.(그런 줄 알았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적당히 일탈도 즐겼었고 때로는 이기적이기도 했으며 실패와 좌절로 깊은 터널 속에 갇혀 있기도 했었다. 게다가 결혼 N 년 차인 그녀는 이제야 서랍 속에서 주걱을 찾아 처음으로 밥솥을 써보는 귀여운 인간미까지 장착한 사람이었다.
분명 추앙하기엔 부족한 사람인데, 왜 나는 그녀를 통해 계속 배우고 있는 걸까? 적당히 방황과 반항도 해보고, 쾌락도 추구해 보고, 삶의 이곳저곳에서 실패를 해봐도 결코 인간은 쉽게 망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지금의 나의 방황과 실패는 내가 느끼는 것만큼 그렇게 대단한 사건이 아니라는 듯 그녀는 존재 자체로 나를 위로하고 지지해 주고 있었다.
“인간은 파괴될 수 있을지언정 패배하진 않아.”
내가 좋아하는 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의 유명한 문장이다.
예전에 이 문장을 봤을 때는 작가의 말에 긍정을 표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 다르다. 인간은 수많은 패배를 통해 파괴를 막는다. 인생은 패배에서 배우며 그 경험으로 파괴의 직전에 스스로를 살린다. 지난날 나의 크고 작은 패배들이 현재의 파괴의 문 턱에서 나를 살리려 삶으로 다시 건져 올린 것처럼 말이다.
운명의 장난처럼 내 인생은 10년마다 나를 새로 쓰고 있다. 그 속에서 지금의 나는 패배라는 바닷속에 깊이 잠수하고 올라온 싱싱한 물고기처럼 미세하게 꼬리를 파닥이며 세상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 저 멀리 아름다운 수평선을 향해, 그 위에 붉게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몰아치는 파도를 온몸으로 부딪히고 있다. 반짝이는 윤슬을 온몸에 그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