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Call me by your name'에 대한 감상
'Because I wanted you to know..'
2018년 4월 21일
“최근에 제가 처음 구입한 이 책을 발견했어요. 그리고 제가 가장 주석을 많이 단 단락이 끝부분에 나오는 펄먼 씨의 연설이었다는 걸 알고는 행복했어요. 늘 제게 가장 많은 공감을 주는 순간은 펄먼 씨가 ‘네가 그것을 알기 전에 네 마음은 닳아버린단다. 그리고 아무도 우리 몸을 쳐다보지 않는 순간이 올 거야. 가까이 오고 싶어 하는 사람이 훨씬 더 적어지지.’ 거기에 형광펜으로 표시하고 줄을 그었더군요. 그리고 지금도 그 문장들은 소름 끼칩니다. 이유는 모르겠어요. 잃어버린 사랑 때문이든, 부모님의 죽음 때문이든 슬플 때 기분이 엉망진창이라면 그것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슬픔의 최절정에서 자책이라는 짐을 더할 필요는 없어요. 그렇게 하는 것이 인간의 특징이긴 하지만요. 그러나 그것은 자기를 혐오하는 세대의 특징이기도 하죠. 제 세대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제가 평생 지니려고 했던 것이기도 해요. 영화 장면을 찍을 때 저는 다른 사람의 대사도 외우는 걸 좋아합니다. 그냥 리듬을 알기 위해서죠. 하지만 그 연설은 방대합니다. 그래서 저는 외우지 않기로 했습니다. ‘티미, 그냥 들어, 그냥 들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펄먼 씨의 대사로 시작했어요. 그러나 그들이 그 장면에서 저를 이용한 부분, 그것을 보는 건 늘 감동적입니다. 처음엔 그를 보고 그 후엔 저와의 상호작용을 봅니다. 그 연설을 들으면서 캐릭터에 충실해. ‘엘리오가 돼, 엘리오가 돼, 엘리오가 돼’라고 생각하던 게 기억나니까요. 그러나 제 뇌의 어떤 부분은 ‘티미, 제길 이 남자의 말을 들어. 이 문장들을 들어. 그걸 네 뇌 속으로 가져와’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이 가식적으로 들리지 않길 바랍니다. 당신과 있을 때 처음으로 든 생각이긴 하지만 젊은 배우라는 위치나 ‘커져가는 성공’에 지치는 것은 아주 쉽고 매력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말하자면 예술이 자애로운 힘을 발휘하는 순간입니다. 그것은 예술이 저를 도왔던 순간이에요. 영화라는 예술이 저를 더 나은 사람으로 변화시킨 순간이죠."
무언가를 깊이 애정 하게 되면 많은 말이 끓어오름과 동시에, 쉽고 간단히 판단하기 싫어서 아무 말도 못 하는 마음. 영화를 보고 많은 말을 하고 글도 썼지만, 뱉은 말이 정말 내 마음을 대변해주는지 아니면 아예 하지 않은 편이 나았는지 잘 모르겠다. 나는 이 영화가 한 편에서 퀴어영화나 게이영화로 불리는 게 싫었다. 동성 간의 로맨스가 그저 게이영화로 규정지어지는 게 싫었다. 하지만 동시에 몇몇 사람들에게 이 영화를 설명할 때 퀴어영화라고 설명하는 모순된 내가 있었다. 누가 말하지 못하게 한 것도 아닌데 괜히 자기감정에 빠진 사람이나 아는 척하는 사람처럼 보일까 봐 겁이 났다. 그러고는 '사실 나는 로맨스나 성장영화라고 생각해. 아니 그보다 더 넓은 범위의 영화야'라고 고쳐 말한다. 나는 아직 이런 사람이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왜 나는 내 말에 두려움을 느끼는가? 책임감이 아니라 두려움 말이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가 무서운 걸까? 말과 글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쉬우니까?... 모순덩어리라면 차라리 거짓말을 하는 게 낫다.
- 인터뷰를 이것저것 찾아보면서 그중 느낀 건 티모시가 ‘예술은 스크린에 있는 게 아니라 관객들의 머릿속에 있는 것’이라며 이 영화에 대해 자유롭게 판단해주길 바란다는 것이다.
아직 이 영화에 대한 감상이 끝나지 않았다. 마침표를 찍지 않았다. 원작을 읽는 중이니 하고 싶은 말이 더 늘어날 수도, 싫은 기억이 떠올라서 그건 쏙 빼고 다시 글을 쓸 수도 있겠지. 보그 인터뷰에서 제일 인상 깊게 읽은 티모시의 말과, 이 영화의 큰 주제를 다시 마음에 새기고 싶다. 내가 느낀 감정을 외면하지 말 것. 자책하지 말기. 자기혐오를 하는 세대에서 어떻게든 자기혐오를 그만두기. 그리고 나를 드러내기. 아닌 척하지 말기...
영화 속의 엘리오와 소설 속의 엘리오가 완전 다른 느낌으로 사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