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me by your name' 여행기 1 - 리첸고 호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 엘리오와 올리버가 수영을 했던 리첸고 호수
리첸고 호수로 처음 가던 날. 지도만 믿고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점점 이상한 길로 빠지게 된다.
마을을 벗어나 무난하게 달려오던 중간에 지도가 갑자기 좁은 비포장도로를 가리키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비포장도로가 이어지나 싶어 의심 없이 들어갔는데, 이내 좁은 숲길이 나타났다. 호텔에서 빌려온 일반 자전거로는 갈 수 없는 길. 자전거를 끌고 기여코 걸어가는 나. 낯선 곳에선 이런 지도를 믿을 수밖에 없다. (고 그때는 생각했었지만 지금은 절대 아니다.) 자전거가 밭에 떨어지기도 하고 진흙에 멈추기도 하는 와중에 '조금만 조금만...'이라고 읊조리면서 걷고 있던 때, 자전거 라이딩을 하는 남자가 (아마도 이탈리아인) 맞은편에서 자전거를 끌고 걸어오며 내가 헤쳐왔던 길을 가리키며 물어왔다.
"길이 있나요?"
(길이라고 하긴 애매하지만 길이긴 하니)
"네. 그런데 무척 험해요"
"문제없어요"
라고 말하고 쿨한 웃음을 날리며 이내 지나갔다.
여행에서 재미있는 순간은 누군가가 나에게 서슴없이 말을 걸어올 때이다. 그게 그 나라 말이건 익숙한 짧은 영어건 상관없이. 내가 이방인인 걸 알고 있으면서도 낯설게 대하지 않는 태도가 날 얼마나 편하게 했는지 모른다. 혼자 다니다 보면 별개 다 감동스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험한 길 그 끝에 리첸고 호수가 있다. 내가 헤쳐온 길 맞은편에 성한길을 허탈해하며 주말 나들이를 나온 가족들과 친구들 무리 사이에 담요를 깔고 앉았다.
(집으로 돌아갈 때는 지도를 확인하며 2차선 도로를 달려 멀리 돌아갔다.)
생각보다 사람이 많아 긴장이 됐다. 게다가 주말이었다. 혼자 아시아인이어서 눈에 띄니 태연한 척하기도 어려웠다. 내 성격 때문 일까? 그런 곳에선 왠지 쿨한 척해야 했다.
무언가 아쉬웠다. 엘리오와 올리버가 새벽 수영을 했던 장소라고 느끼기도 어려울 만큼, 사진을 찍기엔 사람이 너무 많았다. 한편으로는 엘리오가 유대인 목걸이를 하고 친구들과 수영을 했던 장소이기도 하기에 그 장면의 시끌벅적한 분위기와 꽤 비슷해 기쁘기도 했다.
다음 날 다시 리첸고를 가기로 했다. 월요일이니 모두 일하거나 학교에 갔겠지. 빨리 가는 지름길이었을 뿐 편한 길은 아니었기에 지도를 보고 대충 가늠을 했다. 이 도로가 어제 돌아올 때 왔던 길이구나. 처음 길 보다 한참을 돌아갔지만 쌩쌩 달릴 수 있었다. 어제 집에 돌아왔던 길과 풍경을 거꾸로 되짚으며 이탈리아의 여름 햇빛 아래 달리고 또 달렸다.
아름다운 강풍경이 보이는 다리를 건너, 시내와 마을을 벗어나 밭이 보이기 시작하면 낡은 교회와 넓고 마당 있는 집이 한 군데씩 보이고, 콘크리트 공장을 지나 왼편 도로로 무작정 달리다 보면 'Ricengo'라고 적힌 표지판이 보인다. 어느 지점에서 나무가 우거진 돌길을 통과하고, 다시 도로로 나와 끝없이 달리다 왼편 숲길로 가면 보이는 두 갈래의 길. 어제 호수에서 빠져나오면서 마주했던 길이 뒤집어진 길. 어제는 어디로 나가야 할지 몰라 운에 맡기고 들어가 본 곳. 어제는 오른편 오늘은 왼편. 그곳은 누군가의 집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실제로 쭉 들어가다 보면 그냥 길인가 싶어 계속 들어가게 되는데 막다른 곳에 큰 집이 있다. 이 길을 들어갈 때 누군가와 마주쳤는데 아마 집주인이 아닐까 싶다. 근데 나 같은 사람이 많았는지 그냥 지나쳐주었다. 그라치에...) 직진은 리첸고호수로.
두 번째 리첸고. 이번엔 아무도 없었다. 정말 나 혼자였다. 엘리오와 올리버가 새벽 수영을 하던 그곳. 그 분위기 그대로였다. 엘리오의 복잡한 마음을 가늠하지 못하고 당황스러운 마음뿐이었던 올리버. 그리고 침묵의 새벽 수영. 책에서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후 수영을 하며 엘리오는 올리버가 한없이 약하고, 지켜주고픈 대상으로 여기며 연민과 같은 마음을 느낀다.
나도 수영을 하고, 사진도 찍으며 호수에서의 시간을 만끽했다. 영화의 장면을 혼자 만끽하는 호사스러움. 책도 읽고 멍을 때리며 한가로운 아침 겸 점심시간을 보냈다. 광장에서 사 온 납작복숭아와 무화과도 호수 물에 대충 씻어먹었다. 자유. 고요하다. 고독해서 좋았다. 외롭지 않았다.
그때 저기 건너편에서 수영하는 주민 한 분이 보였다. 이쪽으로 수영해서 오시는가 했더니 이내 없어졌다. 집에 가는 길에 자전거를 끌고 올라오는데 웬걸 나무 사이에서 낮잠을 주무시고 계셨다.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 평화가 부러워 이 사람의 오후를 훔치고 매일 내거로 만들고 싶었다. 그러면 난 매일 행복할 수 있을까? 가능하다면 정말 그렇게 했을 것이다.
집(호텔)으로 갈 시간이다.
등 뒤를 쬐는 햇빛. 건조한 바람. 외로울 때 즘 왔다 갔다 하는 차와 자전거들. 그 모든 것에 취해 달리다 보면 크레마의 두오모 광장 뒷마을에 다다른다. 리첸고호수까지 가는 길을 만끽하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달린 기억들.
엘리오와 올리버가 자전거를 타고 나란히 달리는 장면이 겹친다.
처음 리첸고 호수로 가고 싶다고 했을 때 '자전거로는 못가'라고 했던 호텔 직원이 자전거에 묻어있는 진흙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여행을 준비할 때 도움이 되었던 한 블로거는 버스를 타고 가서 한참 걸어갔다는데,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게 가장 좋은 코스이다. 40분 정도 쉬지 않고 여러 도로와 길을 내달리는 기분이 얼마나 상쾌하고 행복한지. 그 행복이 다다르는 그 끝에 사랑스러운 호수를 마법처럼 마주하는 그 순간...
내가 이렇게 자전거를 좋아했던가? 일본에서도 자전거를 자주 탔지만 그저 이동수단이었고 가끔 달리는 기분은 좋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좁은 골목과 주택들과 복잡한 상가 사이로 엉금엉금 페달을 밟는 일은 썩 즐겁지는 않다. 하지만 낯선 이탈리아의 어느 시골 도로를 달리는 기분은... 정말 내가 살아있음을 깨닫게 했다. 아직 그 기억들이 남아 글로 쓸 수 있는 걸 보면 내가 꿈을 꾼 건 아니었구나. 아직, 아직은 추억이라 부르지 말아야지. 추억은 때론 슬프니까. 기억들을 다시 나열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때보다 더 온전히, 완전히 내 걸로 만들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