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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름 Jan 30. 2019

이탈리아에서 온 선크림

기억의 구석에 있는 것들 (작은 이야기) - 1


 베르가모 공항에 도착해 공항에서 베르가모역으로 그리고 크레마역으로 향했다. 오후가 한참 지난 시간, 크레마 마을에 처음 도착해 체크인을 하고 호텔에 짐을 푼 뒤 제일 먼저 한 일은 선크림을 사는 일이었다. 뉴욕에서 산 라벤더향 선크림을 공항에서 빼앗겼기 때문에, (보라색 패키지가 정말 귀여웠는데...) 그리고 이탈리아의 강한 여름 햇빛에 지지 않기 위해 당장 필요했다. 프런트에 앉아있는 쿨한 이탈리아 직원은 선크림을 어디서 살 수 있냐고 묻자 호텔 밖을 가리키며 '오 선블록을 말하는 거라면 저 쪽 큰 거리에 있는 마트에서 살 수 있을 거야'라고 답했다.


 프런트 직원은 모두 여직원이었고 두 명이 교대로 일을 했다. 아침에 일을 하는 사람은 프런트와 프런트 뒤편에 있는 카페테리아를 왔다 갔다 하며 손님들에게 무슨 커피를 마실지 물어보았다. 항상 에스프레소 아니면 카푸치노라고 물어왔기 때문에 이틀간 똑같이 카푸치노를 마시겠다고 했고, 3일째에는 '카푸치노?' 하고 먼저 물어왔다. (아마 물어보기 전에 카푸치노 버튼을 이미 눌렀을지도 모르겠다.)


 직원이 말한 대로 호텔을 나와 두 블록쯤 지나자 큰 거리가 나왔다. 큰 거리라고 해봤자 사람들이 붐비는 것도 아니고 가게가 즐비한 것도 아니지만 여하튼 크레마에선 큰 거리였다. 마트는 지상 1층과 지하 1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1층은 화장품과 생활 용품, 지하 1층은 식품을 팔고 있었다. 선크림은 벽 한 면을 차지할 만큼 종류도 양도 많았다. 선크림을 고르고 있자 직원이 다가와 뭐라고 말을 걸어왔다. 아직 이탈리아 인사 'Caio 챠오'에도 익숙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반갑기도 하고 어리둥절한 와중에 직원이 팻말 하나를 가리켰다. 할인 이벤트 중이라는 것이었다. 'Grazie 그라치에'라고 말하고 다시 살펴보다가, 알로에가 들어간 선크림을 하나 골랐다. 그때는 정말 몰랐다. 이 선크림이 나중에 어떤 향수를 불러일으킬지를.


 이탈리아 여행 중 입었던 옷들은 정말 자유로웠기 때문에 선크림이 꼭 필요했다. 주로 어깨와 등이 드러나는 오프숄더를 입거나, 바로 수영을 할 수 있도록 남색 수영복위에 노란색 파타고니아 남성용 수영 반바지(올리버를 생각하며 샀다.)를 입었는데, 리첸고호수로 내달리던 길에는 아무리 선크림을 등과 목에 발라도 이내 타기 마련이었다. 얼마나 오래 달렸는지 햇빛이 제일 잘 닿는 목 뒷덜미가 항상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사실 피부 보호만 된다면 타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까맣게 타기를. 한국에서는 이렇게 멈추는 일 없이 자전거를 탈 일도, 등과 목에 햇빛이 오랫동안 닿아도 기분이 좋을 일은 거의 없을 테니까.


 나는 목 바로 밑, 그러니까 가슴 위 중앙에 켈로이드 흉터 하나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한국과 일본(일본에서 5년을 살았습니다.)에서는 상상도 못 하는 옷차림이었다. 이탈리아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내 흉터를 상처를 바라보지 않는다. 처음 만나도 다시 만나도. 내 눈을 바라볼 뿐. 그런 자연적 환경과 사람들 속에서 내가 느낀 자유는 아마 내 인생에 최초였을지도 모른다. 슬프게도. 아니 기쁘게도. 그리고 이 여행 이후로 한국에서도 어깨와 흉터가 드러나는 옷을 입을 수 있는 용기가 생겼음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크레마와 시르미오네의 가르다호수 마을, 베르가모, 발본디오네의 폭포를 거치며 계속 발라왔던 알로에 선크림은 한국에 와서 잠깐 방치되었다. 그리고 요즘 가끔 화장을 하지 않고 밖을 나설 때 다시 꺼낸다. '빨리 써버려야지'라는 생각으로 다시 쓰기 시작했던 이 선크림을 바르면, 알로에와 크림이 섞인 향과 함께 이탈리아에서 겪었던 모든 일이 한순간에 피어오른다. 동시에 크레마 호텔의 작은 객실과 리첸고 호수 앞으로 나를 데려다 놓는다. 두오모를 지나며 광장 한켠에 전시된 엘리오와 올리버의 자전거를 본 일, 관광안내소 직원과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던 일, 티켓을 잘못 사 버스기사 아저씨와 말이 안 통하는 무의미한 실랑이를 했던 일, 말이 통하지 않는 일상에 익숙해지니 표정만으로 읽을 수 있는 언어들. 그 모든 게 어떤 분위기(Aura)가 되어 마구 피어오른다.


이 작은 알로에 선크림 하나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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