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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때굴짱 Mar 06. 2024

나의 아주 오래전 기억

어린적의 기억은 온통 행복했네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은 다섯 살 무렵이다. 그날은 여느 때와 달리 매우 특별했는데, 아버지는 동생이 태어났으니 병원에 가자고 하셨다. 아마도 엄마는 홀로 병원에 가셨나 보다. 이후의 기억은 병원이라는 낯선 곳에 들어섰다는 나의 두려운 시선과 엄마가 동생에게 젖을 물리는 장면이 어렴풋이 교차된다.
이후로도 동생이 갓난 아기 일 때 예뻐했던 기억이 조금 나는데 그게 사진을 통해서 기억이 재편된 것인지는 조금은 불확실하다.  


나와 동생은 네 살 터울에 동성이다. 동생은 조금 특별났는데,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개구쟁이에 말썽쟁이었다. 나와 조금은 터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녀석에게 오래도록 시달린 기억이 잦다. 1년에 몇 차려 조용할 때가 있었으니 그날은 동생이 심하게 아픈 날이었다. 그 며칠을 안심하며 보냈던 기억이 나는 걸 보면 정말 성가실 정도로 귀찮아했다. 웃긴 건 정작 본인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며 선을 긋는다. 세월이 흘러서 지와 똑닮은 아들에게 겪고 나서야 누굴 닮았는지 모르겠다면서 손사래를 치는 모습에 부모님과 나는 크게 웃었다.


옛 생각도 떠올릴 겸, 동생이 조카 때문에 힘들어하는 모습을 기분 좋게 바라볼 겸, 조카의 까불까불한 모습을 오래도록 보질 못하는 게 아쉽다. 동생은 오래전에 미국행을 택했다. 대학 때 어학연수를 다녀왔었는데 한국 생활과 다른 여유 있는 모습에 반하여 그곳에서 터를 잡겠다며 결심 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동생의 이민을 반대했었고, 결국 포기한 듯하다가 짱구를 굴린 게, 제수 씨의 대학원 핑계로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같은 핏줄인데도 성격이 확연히 다른데 새로운 도전을 좋아하는 동생을 볼 때면 부럽기도 하다. 장남은 부모님 곁에서 가까이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효도라 생각한다. 물론 아내에게는 조금 미안하기도 하지만서도·····.




국민학교 5학년 때까지 가게와 붙어 있는 단칸방에서 지냈는데, 네 식구가 드러누우면 꽉 차는 방이었다. 그보다 더 괴로운 게 있었으니, 세 가족이 한 화장실을 공유했다는 현실이었다. 소변은 요강으로 해결하면 되지만 아침의 쾌변은 종종 줄을 서야만 가능했다.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기억하는데, 한 번은 너무 급한 나머지 엄마와 엉덩이를 맞대어 변을 보았던 웃지 못할 추억(?)도 갖고 있다. 응가가 훤히 보이는 퍼세식이라 냄새가 엄청 심했을 텐데, 그런 기억은 전혀 없다는 게 신기하다. 부모님 댁에 가면 마당에서 놀던 사진들이 있는데 다음에 가서 찍어서 여기에 올려 두어야겠다. 변소 문짝도 찍혀 있으면 좋겠다.


어릴 땐 가난이란 걸 전혀 의식하지 못했는데, 주변 친구들 대부분이 비슷하게 살았기 때문이다. 그땐 아이들도 참 많았는데 우리들의 일이라곤 그저 놀고먹는 일이 다였다. 그 어렵던 시절에 돈 한 푼 안 들이고도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일이 다양했는데, 땅따먹기, 12345678, 술래잡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얼음 땡, 다방구,구슬치기, 역할놀이, 빨간벽돌을 가루 내어서 고춧가루라며 가짜 반찬을 만들기도 했다. 매년 여름이면 초안산에 가서 어린 밤을 따오기도 했다. 한 사람당 모기 20 ~ 30방은 기본으로 물려왔었던 기억도 난다. 그 시절 그 아이들은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다시 만나면 참 반가울 텐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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