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에서 영혼을 분리해서 견딜 수 있다면 그렇게 해도 좋아.>
회사 생활이 힘들 땐 '지금 이건 다~ 드라마다.'라고 생각한다. 나는 드라마 속 주인공을 연기하고 있고 이건 그냥 가상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그러니까 너무 몰입할 필요는 없다고.
어차피 다 가짜인데 이 상황에 이입해서 상처받을 필요도 없다.
'그냥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군.'이라며 육체에서 영혼을 분리하여, 외부에서 현상을 무덤덤하게 바라볼 수 있다.
그래도 너무 힘들고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지금 이런 일들은 스토리 전개상 꼭 필요한 위기의 순간이며 그렇기에 이 드라마는 전체를 모아보면 더욱 다채롭고 재밌는 구성으로 완성된다고 받아들인다.
스토리 전개는 시간의 흐름을 타고 있으니 이 일들은 곧 끝날 거라는 믿음이 있다.
드라마는 극적인 구성만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 기승전결의 오르막과 내리막의 흐름이 있다.
그 파고의 아주 작은 한 부분을 떼어내어 극적인 효과를 부여하여 한 편의 TV드라마로 만들어내는 중이라고.
우리 인생은 그 기승전결의 물결이 수시로 반복되는 것이다. 심지어 한 번에 여러 가지 사건의 파도가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은 결(結)이 있듯, 시간에 맡기면 어떤 일이든 끝을 향하게 된다.
내 마음이 깔끔하게 체념을 하든, 사건이 완벽하게 해결이 되든, 일들이 흐지부지 애매하게 사라지든.
어떻게든 마무리의 단계가 온다.
그래서 괴롭다고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 사건의 흐름은 시간을 만나야 정리 단계를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건마다 해결에 걸리는 시간 소요량이 다르므로 시간을 빨리 돌리거나 내가 빠르게 달려 나간다고 그 시간을 줄이기는 쉽지 않다.
인생엔 빨리 감기가 없다.
물리적인 사건은 모두 해결이 되었지만 마음의 응어리는 아직 숙제를 풀지 못해 진행중인 괴로움이 남아 있을 수 있다.
이럴 땐 충분히 그 애도와 치유의 시간을 겪어야 한다.
그냥 오롯이 내 몸으로 그 모든 시간을 하나하나 거쳐가야 끝이 나는 일이다. 그래서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오히려 회피한 일 보다 정면으로 돌파한 일이 후회가 적고 회복이 빠르다.
우리는 인생살이에 아무런 갈등이나 시련이 없기를 바란다. 그러나 꽃길로 갈려면 흙길을 거쳐야 한다.
무탈하기만 해서는 인생이 다채롭게 즐겁고 소중하기가 힘들다. 우리 인생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기 때문에 노력을 하고 감사를 할 수 있다.
삶이 마냥 편안한 천국 같아서는 우리의 나태함과 오만방자함은 끝도 없을지도 모른다. 사실 천국은 무척 지루하지 않을까.
어려운 일을 이겨내며 겸손을 배우고 성장할 수 있고, 내 손으로 만든 것들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지나고 보면 다 재밌는 기억들이 된다.
세상살이의 시련을 통해 내 인생에 맡겨진 숙제를 풀어가며 나 자신을 조금 더 현명하게 만들어 갈 수 있다.
태어난 대로 대충 살아도 되겠지만, 인생이란 위기를 노력으로 바꿔가며 성장하는 자신을 바라보는 즐거움도 있다.
이런 고통을 통해 조금 더 단단해지고, 훨씬 여유 있어지면서, 소중한 것들과 아름다운 것을 느끼는 안목과 감각을 키울 수 있다.
그래서 예전에는 몰랐던 것들에 자꾸 감동을 받고 시선이 가게 된다.
요즘은 길 가다 땅에 대충 피어난 들풀조차 왜 이렇게 기특하고 예쁜지. 아스팔트 틈새를 뚫고 올라오느라 얼마나 애썼을꼬~
그래서 나이가 들면 사소한 것들이 아름답게 보인다. 사소한 노고를 이해하는 사람이 되어간다.
많은 것들을 당연하게 여겨버리지 않게 된다. 사소한 것이 사실은 중요한 것이었다는걸.
어릴 때 현생이 너무 힘들어서 이건 내가 지구인을 체험하러 온 일이다라고 생각하며 견딜 때가 있었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지금 다양한 일들을 경험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비교적 덜 괴로웠다.
미술학원에서 선생님께 맞는 순간조차도 지구인 체험으로 승화하여 즐기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지구인 삶 재밌네.'
요즘은 힘든 일들이 연속으로 터질 땐, 글감 모으는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이 평온할 때나 즐거울 때는 글들이 안 나온다. 기쁨이 충만할 때는 도파민이 폭발하며 정신이 붕 떠있다. 생각이 필요 없고 본능적으로 즐기는 상태다.
힘든 일을 겪는 순간에는 몸과 마음이 침체되어 있다. 여러 생각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닌다. 그 생각들은 머릿속 어딘가에 보관이 되어있다가 아픔이 사라진 뒤 글로 재탄생된다.
글로 풀어내며 힘든 기억을 되살리면 괴로운 순간도 있지만 생각을 다시 정리해 가는 과정에서 마음이 치유되기도 한다.
솔직히 영감덩어리 천재 작가도 아니고, 집에만 평화롭게 있어봐야 글 소재가 나올 리 없다.
회사 좀 나가서 진상들도 만나보고, 힘든 일도 겪고, 잘 되던 일들도 드라마틱하게 꼬여봐야 그 안에서 머리 쥐어뜯으며 사고도 깊어지고 좋은 글 소재도 만나는 거 아닌가 싶다. 이 시련들은 다 글감 채집이 되니 꽤 이득이다.
상상력이 부족한 건지 내가 겪지 않은 상황에 대한 깊은 고찰이 쉽지가 않다. 내가 직접 겪어 깊은 분노와 고뇌 속에서 발버둥을 치고 나와야 나만의 유니크한 이야기들로 풀어낼 수 있다.
모든 것들을 괴로워봐야 결실을 본다는 것이 참 만만찮지만.
마치 영화 '서편제' 같이 한이 조금 서려있어야 내 글들도 현실 세계로 튀어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