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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인미D Nov 17. 2024

14.우린 인생을 클리어런스 할 수 있을까?

<전반전을 정리하고 전혀 다른 후반전을 가야 한다면.>


지금까지 만들어 온 모든 업적을 리셋하고 다시 시작 가능하신 분?

용두사미를 영어로 안티 클라이맥스라고 한다.


우리는 클라이맥스에 올라가자마자 내려와야 할 때도 있고, 한참 걸어왔던 길을 바꿔야 할 때도 있다.

나는 막연히 내 인생의 방향을 바꿀 때는 첫 번째 일(전공)이 클라이맥스에 오른 시점이라고 생각했다.

아직은 한창이라고 생각했지만, 전환점이 생각보다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아직 클라이맥스에 다다르지도 않았는데.... 이거야 말로 안티 클라이맥스가 아닐 수 없다.

운이 좋아 전공을 살려 취업을 했고 18년간 디자이너로 직장생활을 했다.


내가 짐작한 은퇴 시기는 50대 초반.

그러나 아직 40대 초중반인데 정리해고의 물결이 시작되고 있다.

국내 많은 대기업들이 명예퇴직, 희망퇴직, 권고사직 등의 이름으로 슬림화하는 중이다. 이 상황은 내가 고교시절 봐왔던 IMF를 몸소 체험하는 느낌.

요즘 기사에서 동종 기업들의 인력감축 상황을 보면 참 마음이 무겁다.


그 칼날이 나와 내가 아끼는 사람들을 향할까봐 몇 주간 너무 괴로웠다.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최대한 숨죽여 일만 했고 타인과의 대화를 아꼈다. 남편에게까지도...(매일 지겨운 신세한탄 해봐야 서로 좋을 게 없다.)


대기업이 이렇게 힘드니 같이 일하는 협력사에게 돌아가던 일도 점점 줄이다 못해 끊겨가는 중이다. 같이 일하던 협력사 실장님들이 일 좀 달라는 안부 인사를 하기도 하고 내년 연간계약 여부를 물어보기도 한다.

늘 자신만만하던 나도, 올해만큼은 자신이 없었다. 죄송한 마음과 그간 정확하게 말 못 했던 어려운 내부 사정을 전했다.


오랜만에 구직 사이트를 열었다. 가고 싶은 회사가 없다. 그리고 팀장급인 내가 갈 수 있는 곳이 없다. 취업시장이 얼어붙어 있고 채용이 전무하므로, 완전 신입과 팀장은 마찬가지 신세다.


이 상황에서 해결책은 타사로 재취업이 아니라 내 회사를 차리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갑자기 창업지원금을 알아본다. 생애최초 창업지원 자격은 나이를 한참 넘겨버렸다. 창업도 30대에 했어야 했는데... 이 나이쯤 창업하려면 그냥 자기 돈으로만 해야 한다.


이 생활이 영원할 거라고 생각은 안 했지만 생각보다 빠른 전개와 변화에 스스로 미래를 다시 그려보고 생활을 정비하는 중이다. 넋 놓고 살 때가 아니었는데...


사실 나는 은퇴 후 직장생활을 하고 싶지 않다. 직장에 고정된 내 9-6시간을 담보로 잡아버리는 인생은 충분히 경험해 봤다.

어차피 갇혀있는 시간, 그 시간들을 후회 없이 알차게 일하며 썼지만 인생 후반전에는 나를 한정된 시간과 공간에 가둬 놓고 일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이미 그렇게 세상은 변하고 있다.

9-6 시간과 고정된 오피스 공간에 갇힌 일이 중요했던 세상이 빠르게 무너지는 중이다.


어린 시절 나는 보여지는 모습을 중시했다.

시대의 호황기에 사회로 나와 순조롭게 대기업에 신입으로 입사했고, 강남의 커다란 빌딩으로 출근했다.

내 이름이 적힌 사원증을 목에 걸고 책상에는 회사로고가 박혀있는 다이어리가 있었다. 깨끗한 책상과 매일 두 끼를 주는 직원 식당, 또래 친구들에 비해 높은 연봉, 넘치는 복리후생.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는데 단 하나 안 완벽했던 건, 내가 너무 불행했다. 스스로 너무 성공한 모습에 심취했다.

그 시절 종종 숨을 못 쉬었는데 스트레스가 아니라 공황 장애였다. 도피 유학을 준비하며 견뎠다.


그렇게 여러 기업을 거치며 지금의 회사에 정착했다. 대기업 치고(보수적이긴 하다) 나름 수평적이며 여성 우호적인 문화 그리고 업계에서도 윤리적이고 젠틀한 기업 이미지까지. 힘든 시간들이 많았지만 나는 여기서 나의 마지막 직장 생활을 쓸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40대 은퇴. 빨라도 너무 빠르다. 나는 아직 클라이맥스 근처도 안 왔는데.. 한참 진행형인데...


정상을 부정하며 다시 시작하며 살 수 있을까?

정상에 도착했을 때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다른 길로 갈 수 있을까?

힘이 빠진다. 정상에도 안 가봤는데 내려가라니...


당연히 은퇴 후에도 디자인 스튜디오를 차려서 디자이너로 살아가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요즘 대기업이 일을 주기를 기다리는 협력사들도 많이 힘들다. 기업이 힘들면 디자인 에이전시도 같이 힘든 것이다.

이 상황을 눈앞에서 보고 있는데 디자인 스튜디오를 안정적으로 오픈해서 키워나갈 자신이 없어졌다.

같이 일하던 후배에게 나중에 내가 회사 차려서 불러주겠다고 큰소리 땅땅 쳐놨는데 나 자신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요즘 나는 정신이 나가다 못해 바람이 들었다. 내가 해 온 많은 공부들을 통해 새로운 일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익숙하던 일 말고, 정말 새로운. 누군가의 일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내가 업의 영역을 창조해 나가는.


졸업 후에도 다양한 분야의 공부를 해오고 있다. 너무 다채로워서 하나의 업으로 묶기도 힘들다.

나는 은퇴 후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게 자식은 없지만, 신혼 때 아이를 낳았다면 아마 열두 살이 됐을 거다. 그 아이에게 묻듯 나에게 묻고 싶다.

"너 장래희망이 뭐니?"


40대에 어떤 미래를 그리고 시작할 수 있을까?

막연해서 두렵고 걱정스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너무나 재밌는 일이 일어날 거 같아서 갑자기 설레기도 한다.

요즘 기대와 공포가 1초마다 번갈아가며 나를 괴롭히는 중이다. 이 정도면 조울증 아닌가?


앞으로 뭘 하면서 재밌게 살아갈까.

그냥 하던 디자인 하는 게 제일 편할 순 있겠지만 기존의 비즈니스 답습이 언제까지 통할 수 있을까?


40대에 시작하는 장래희망에 대한 진지한 고민.

그동안 겉멋이 들어서 너무 스스로 옥죄었다. 나도 좀 여유 있고 재미있게 살 필요가 있다. 돈벌이가 꼭 이렇게까지 비장할 필요가 없지 않진 않을까?

물론 이 악착같음으로 경제적 자유를 얻고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마음은 늘 쫓기고 있었다.

세상이 바라보는 내 조건은 괜찮아 보였겠지만, 내 마음은 늘 안 괜찮았다. 괴롭고 힘들었다.


돈 좀 없으면 어때.

나는 울고 싶지 않아. 다시 웃고 싶어 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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