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일을 따라 워킹맘의 삶을 접고 다섯 살 아들과 함께 유럽에 온 지 2년이 되었다.
20대 시절, 장난 삼아 주재원 와이프 되는 게 내 꿈이라고 말하곤 했었다. 해외 생활에 대한 동경이 컸던 나의 철없는 말장난이었지만 어쨌든 30대 후반에 갑작스레 꿈(?)을 이루게 되었다.
장밋빛 유럽 생활을 꿈꾸며 다니던 회사를 퇴사하고 출국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팬더믹이라는 어마어마한 변수가 생기면서 가족 비자발급과 입국에 제약이 생겼다. 예상치 못하게 남편과 6개월간 생이별을 해야 했고 그렇게 나와 아이는 예정보다 6개월 늦게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우리 이삿짐을 실은 배는 세상 느긋하게 바다를 건너고 있었다.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책도 장난감도 몇 없는 텅 빈 집에서 다섯 살 아들과 종일 시간을 보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코로나 때문에 마트에서도 식재료 코너만 열려 있는 상황이었고, 또 이삿짐에 있는 수많은 아이의 물건들이 떠올라 새로운 것을 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들과 나는 종이에 피자 도우와 각종 토핑을 그려 색칠하고 잘라 조합하며 수십 가지 종류의 피자를 만들었다. 오븐은 침대 밑 작은 공간이었다. 또 윷놀이를 좋아하는 아들은 윷 대신 포켓몬 카드 네 장을 던져 윷놀이를 했다. 그래도 나름대로 '빽도'도 있었다. 유튜브를 찾아가며 아이와 집에서 할 수 있는 놀이로 시간을 보냈지만 여전히 하루는 너무 길었다.
아이가 갈 수 있는 유치원은 없었다. 주재원 자녀들은 보통 국제학교에 다니기 마련인데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에는 국제학교가 없었고, 가장 가까운 곳은 국경 너머에 있는 작은 국제학교 하나였다. 남편의 전임자 아이는 그 학교의 부속 유치원을 다녔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힘든 3년을 보냈다고 했다. 또 그들이 느끼기에 그 학교는 아시안에게 호의적인 학교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인종차별을 경험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곳에 아이를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언어를 전혀 모르지만 곧 적응하겠지 라는 생각으로 현지에 있는 유치원과 학교에 보낼 계획이었다. 하지만 공립, 사립 모두 정원이 차서 아이를 받아줄 수 없다고 했다.
그저 대기 명단에 올려놓고 2개월쯤 보냈을 때 무작정 동네에 있는 유치원에 찾아갔다. 그리고 원장 선생님께 사정했다. 며칠 후 고맙게도 원장님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외국 어린이의 경우 학교 입학을 위해 언어 습득이 반드시 필요하므로 유치원 정원이 초과돼도 아이를 받을 수 있는 법 조항을 찾아냈다는 소식이었다.
그렇게 아이의 유치원 생활이 시작되었다.
15개월에 시작한 어린이집, 해외 이주를 준비하며 다닌 영어유치원에서도 아이는 늘 씩씩했다. 새로운 기관에 뚝딱 적응하는 기특한 아이였다.
엄마랑 종일 집에서 노는 게 꽤나 지겨웠는지 새로운 유치원에 가기 며칠 전부터 아이는 기대에 차 있었고 그런 아이를 보며 우리 아이는 여기서도 뚝딱 적응해 낼 거라 생각했다. 더 이상 걱정이 없었다.
등원 첫날 아침, 아이를 데려다주고 집에 돌아와서 잘 적응하고 놀고 있을 아이 모습을 상상하며 오랜만의 내 자유시간을 만끽했다. 하원 시간에 맞춰 아이를 데리러 갔는데 청소 중인 어두운 교실 안에 아이 혼자 남아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한 시간 정도 이른 시간에 모두 집에 갔다고 했다.
유치원 입학 전 원장님께 몇 시에 마치냐고 물었고 그녀는 4시 반에 끝난다고 했다. 한국 유치원 운영 방식에 익숙해져 있던 나는 당연히 4시 반에 아이들 모두 다 같이 하원하는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원장님이 말한 4시 반은 유치원이 문을 닫는 시간이었다. 3시부터 언제든 부모가 아이를 데리고 갈 수 있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3시 반쯤 모두 하원한다고 했다. 아이에게 한없이 미안해지는 순간이었다.
아이는 경직되고 슬퍼 보였다. 자신의 기대와 달리 같은 반 아이들과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유치원 생활에 충격을 받은 듯했다. 아이의 선생님은 영어를 했지만 매우 조용하고 차분한 분이셨고, 한국의 유치원 선생님들처럼 하이톤으로 아이를 반기며 적응을 적극 돕는 자세는 아닌 듯 보였다.
며칠의 유치원 생활이 계속되도록 아이는 아침에 등원을 거부했다.
하지만 여기 사는 몇 년간 집에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겪어내야 할 일이었다. 낯선 환경과 언어에도 적응해야 할 일이었다. 아이가 오롯이 혼자 헤쳐나가야 하는 일이라는 게,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없다는 게... 마음이 무척 아팠다.
아침마다 유치원 앞에서 아이는 나를 붙잡고 울었다.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매달리는 아이를 달래도 보고 화도 내 보고. 아이도 참 혼란스러웠으리라...
결국 내가 유치원 앞에서 기다리겠다고 협상한 후에야 아이는 교실로 들어가곤 했다. 추운 겨울, 유치원 밖 보도블록에 앉아 몇 시간씩 아이를 기다렸다. 오전마다 나가는 산책 시간에도 멀찌감치 걸으며 따라갔다.
유치원 창문 너머 보이는 아이의 작은 미소에 마음이 환해지는가 하면 구석에서 혼자 앉아있는 모습에 금세 마음이 무너져 내리기를 반복했다.
몇 주 후에야 아이를 등원시키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집에 있는 시간도 편치 않긴 마찬가지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선생님한테 전화가 왔다. 산책을 가야 하는데 아이가 안 가려고 한다, 산책 나왔는데 아이가 돌아가지 않으려 한다... 수차례 아이를 데리러 가야 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마음 아픈 시기였다. 단단한 엄마가 되고 싶었는데 자꾸만 아이의 마음이 내 것인 것 마냥 아팠다. 매일 밤 자책과 미안함에 자는 아이를 보며 울었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한국을 떠나오기 전 모두들 "아이들은 해외 나가도 금방 적응한다, 어른이 더 문제다" 했었다.
남들에게 쉬운 일이 우리에게는 아니었나 보다. 한국에서 기관에 다닐 때 늘 자신감 넘쳤던 아이가 한순간에 문제아로 변해버린 모습을 받아들이는 것은 정말 힘들었다. 집에서도 아이의 행동이 많이 달라졌다. 매사에 자신감 넘치고 방긋 웃던 아이는 짜증이 많아졌고 과격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3개월이 지났고 아이는 결국 유치원을 그만뒀다. 이대로 뒀다간 아이를 망칠 것만 같다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한편으론 어쩌면 그 유치원이 우리 아이와 잘 맞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집에서 시간을 보내며 다시 다른 곳을 찾아보든 인종차별이 있다고 했지만 남편 전임자의 아이가 다녔던 국제학교 유치원에 가든. 앞일은 일단 덮어두고 아이를 더 이상 유치원에 보내지 않았다.
유치원을 그만둔 후로 아이는 조금 편안해 보였다. 하지만 내 걱정은 더 깊어지고 있었다. 다시 다른 기관에 가도 같은 상황이 반복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가장 컸다.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시간이었으니까..
돌이켜보면 아이보다 내가 더 힘들어했던 것 같다. 아이에게 감정이 요동치고 매일같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엄마였다. 어쩌면 아이에게 나를 투영하고 아이가 느낄 그 감정들을 내 시선에서 과도하게 해석해서 최선을 다해 힘들어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아이는 어디서든, 무엇이든 '잘'해내는 아이라는 믿음을 깨고 싶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참 어리석은 엄마였다.
아이는 지금 국경 너머에 있는 작은 국제학교 1학년에 다니고 있다. 2년 전 현지 유치원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집에서 시간을 보내다 국제학교 Kinder5에 입학했다.
새로운 유치원에 가기 일주일 전부터 아이보다 내가 더 긴장하고 잠도 제대로 못 잤지만 걱정이 무색하게 아이는 첫날부터 유치원을 좋아했다. 선생님들도 친절했고 무엇보다 공식 언어가 영어라 잘은 못해도 듣고 이해하고 말하며 잘 적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아직도 참 고마운 것은 첫날 아침 아이를 선생님에게 인계하고 돌아서는데 아이가 안으로 들어가지도, 나를 따라오지도 못하고 선생님 옆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그때 선생님이 아이 손을 잡고 웃으며 "He is my helper."라고 말해주었다. 아이는 이내 편안한 얼굴로 바뀌었고 기분 좋게 인사하고 헤어질 수 있었다.
지금에서야 이렇게 그 일을 떠올리며 글을 쓸 수 있지만 그때는 정말 다 때려치우고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아이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부모에게는 곱절로 힘든 일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그래서 지금 아이가 적응하고 다니고 있는 이 학교가 너무 고맙다. 선생님도 고맙고 친구들도 고맙고.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말은 괜히 있는 말이 아니었나 보다.
매 순간이 감사한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