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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창 Jul 12. 2020

어느새 세상에서 깎여나가고 있었다

인생의 중간점검


나는 통영을 참 좋아한다. 엄마가 그곳에 있기도 하지만, 몰래 혼자 여행을 다녀오기도 할 정도로 좋아하는 곳이다. 그중 근처 몽돌해변을 가장 좋아하는데, 그곳은 모래 대신 둥근돌들이 해변을 가득 메우고 있다. 모두 똑같이 둥글둥글한 녀석들…… 모난 녀석 하나 없는 그곳, 그 녀석들도 처음에는 뾰족했을 것이다. 하지만 파도에 이리저리 휩쓸리고 자기들끼리 부딪히며 모두 둥글둥글한 몽돌이 되어간 것이다. 


하루는 몽돌해변을 한참동안 바라봤다. 그 돌 하나하나가 내 주변에 흔히 있는 사람들 같고, 나 또한 그런 사람 같았다. 파도에 휩쓸려 어쩔 수 없이 둥글둥글해지는 사람들……  ‘이것이 내가 원했던 삶이 맞는가?’ 한참을 생각하며, '난 원래 어떻게 생겨 먹었었지?' 이제는 기억조차 잘 나지 않는 과거의 내 모습을 떠올려 봤다.



세상을 아는 체 했을 때가 있었다. 


19살, 그때의 세상은 내가 노력만 한다면, 모든 것을 내 앞에 가져다줄 것 같았다. 주관적, 객관적으로 좋지 않은 가정환경임에도, 난 이상하리만큼 긍정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정의 내린 세상은 고3 때 처음 현실과 충돌하여, 꽤나 괜찮은 결과물을 가져왔다. 


그냥 시간이 흘러 살아지던 삶을 살던 중, 갑자기 가슴속에 강렬한 열망이 떠올랐다. 뚜렷한 꿈은 없었지만, 서울에 가고 싶다는 것. 지금 떠나지 않으면 이곳에서 그저 그렇게 살아갈 것 같았다. 나를 아는 이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홀로 세상을 만끽하고 어딘가에 있을 무언가를 찾고 싶다며, 그렇게 처음으로 단단하게 각오를 다졌다.


1년 동안 ‘할 수 있다’라는 말을 수도 없이 외치며, 처음으로 내 모든 것을 걸고 공부했다. 무언가에 이렇게 최선을 다한 것은 19년 인생 중 처음이었다. 고3 1년간 고등학교 3년 전체 과정을 공부하며, 포기할 과목은 과감하게 포기해서 시간을 확보했고, 그럼에도 부족한 시간은, 잠을 줄이며 해결했다. 하루에 밤잠 4시간, 낮잠 30분으로 공부를 이어갔다. 잠을 이기기 위해 뺨을 때려도 보고, 냉수마찰도 해보았으나, 10분 뒤면 또 졸음이 쏟아져 결국 청양고추를 씹어 먹으며 공부를 하기도 했다. 다신 돌아가기 싫을 정도의 힘든 시간, 그 시간의 결과로 지금 학교의 마지막 추가합격자로 입학하게 되었다. 마치 인격체 개념의 '신'과 같은 무언가가 있다면, 이렇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열심히 했으니, 나머지는 내가 도와줄게.” 고3 첫 모의고사에서 34명 중 30등이었던 내가, 어디 인간극장에 나오는 주인공 마냥, 기적처럼 수도권 대학에 추가합격 마지막 번호로 입학을 한 것이다. 엄마 말로는 학교에 플래카드가 붙었다고 했다. 


내가 정의한 세상이 현실에서도 먹히는 것을 확인했고, 애매한 믿음들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난 당당히 현실에 발을 디디게 되었다. 


한 번의 기적이 일어난 이후 겁이 없어졌고, 내가 정의한 세상의 법칙(내가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이뤄진다)을 십분 활용하기로 했다. 돈을 벌기로 한 것이다. 당시 최저시급이 5000원이었는데, 최저시급으로는 생활비를 벌고 학비까지 충당하려면 포기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아 보였다. 그래서, 과외, 카드사, 해외전시 등 다양한 아르바이트 중 돈을 많이 벌거나, 재밌는 일들을 골라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점점 사회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했고,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정의한 세상'을 찰떡같이 믿고 있었다. 가끔 최선을 다 했어도, 원하는 만큼 이뤄지지 않을 때가 있었지만, 그럴 때면 나를 의심했다. 내 노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며, 나를 더 채찍질했고 실패에서 배움을 얻으려 노력했다. 


당시 내 모습은 당당함 그 자체였다. 그때부터 날 봐온 친구들의 말에 따르면 그때의 나는 참 뭣도 없었지만, 당당했다고 한다. 가난을 자랑처럼 떠들고 다녔고, 정의에 집착하며, 너무 솔직해서 가끔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그런 녀석이라 했었다. 당시의 나는 가진 것 하나 없었지만, 아무도 모르는 세상의 비밀을 나 혼자 아는 것처럼 굴었고, 내가 정의한 세상의 법칙대로 마음만 먹으면, 조금만 귀찮게 산다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사람처럼 살았다. 그때만 해도 나는 열심히 살 각오가 되어 있었다.


당시의 나는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며, 일찍이 사회의 민 낯을 봤다. 평생 만날 일 없는 다양한 사람들, 나쁜 어른, 좋은 어른, 심각한 빈부격차, 강자의 횡포 등을 눈앞에서 보고 겪으며, 자본주의 강자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다. 그중 약자에게 발생하는 문제, 노동문제, 직장 내 성 문제, 괴롭힘, 갑질 등 사회적 약자들이 겪는 아픔에 유독 공감하며, 그들의 아픔을 덜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오랜 고민 끝에 인권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약자들의 삶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좋은 변호사, 좋은 어른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당시의 사회는 구조적 정치적으로도 문제가 많다고 여겼기에 변호사가 되어 사회에 나간다면 할 수 있는 것이 많을 것 같았다.


당시의 나는 힘을 갖고 싶었다. 그래서 힘을 가진 사람은 그 힘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사회에 나가서 자본주의 강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디에서도 누구 앞에서도 겁먹지 않고 내 소신을 말할 수 있는 궁극의 당당함이 필요했고, 그러기 위한 필수 재료는 ‘변호사’라는 라이선스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거창한 사명감을 가진 채 또 한 번 각오를 다졌다.  


변호사가 되려면 로스쿨에 가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점, 토익, 법학적성시험 이 세 항목에서 높은 점수가 있어야 하는데, 난 셋 다 엉망이었다. 학점은 당시 아르바이트를 끼고 살았기도 했고, 적성에 안 맞는 학과 공부로 인해 거의 빵점이었다. (2.4/4.5) 졸업한 것이 기적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남은 토익과 법학적성 시험에서는 거의 만점을 받아야만 입학이 가능했다. 남들은 불가능하다 했지만, 그럴 때마다 ‘나만 열심히 하면 될 것이다.’ 라며 내가 정의한 세상을 믿고, 더욱 열심히 했다. 결국 낮은 점수로 당연히 떨어질 것이라는 주변의 만류에도 꾸역꾸역 원서를 넣었고, 떨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고3 때처럼 또 한 번 기적을 일으켜 주겠지……’ 하지만, 그때와 같은 기적은 없었고, 난 툭...... 하고 떨어져 버렸다. 


처음에는, 본인이 정의한 세상을 믿는 사람들이 다들 그러하듯 날 의심했다. ‘내 의지의 문제구나, 내 노력이 부족해서 떨어진 것이구나......’ 그렇게 여기며 재수를 결심했다. 이번에는 고3 때처럼 잠까지 줄이며,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결국 툭하고 떨어져 버렸다. 


세상에서 배척당한 듯했다. ‘내 노력이 부족해서인가?’라고 또 의심을 해봤지만, 더 이상 노력해볼 힘과 돈이 남아있지 않았다. 최선을 다했고,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그제야, 난 내가 정의한 세상을 포기해버렸다.


내가 정의한 세상은 가난하고 가진 것 없던, 내가 믿던 모든 것이었다. 그것 만이 세상에서 나를 온전히 받쳐주었기에 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었는데, 그런 세상이 나를 등져버린 것이다. 상심이 컸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생각 자체를 할 수 없었다. 내가 고민해봤자 어차피 맘대로 안될 거라 생각했기에……. 그렇게 20대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일까’라는 고민이 그때 멈춰버렸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고 생각하기 싫었다. 하지만 생활비 빚 때문에 빨리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재수를 결심했을 때는 마지막이라 생각했기에, 아르바이트 없이 빚을 내어 공부를 했었다) 




'처음 느끼는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내 세상에서는, 고된 생활 속에서도 ‘배움’이라는 말 잘 듣는 마취제가 있어 견딜 수 있었다. ‘내가 열심히만 한다면 언제든 원하는 모습이 될 수 있어’, ‘난 세상에서 약자들을 위해 일하는 멋진 사람이 될 거야’ 그러니 지금 겪는 고생은 모두 필요한 ‘배움’들이야, 다 배우고 나면 사라질 거야……. 그런 마취제가 없어져버린 나에게, 처음 느껴보는 두려움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평생 하기 싫은 일만 하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 '돈 버느라 고생만 하다 죽을 수도 있겠다', '세상에는 특별한 의미나, 무언가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돈 벌고 편히 사는 것이 전부인데, 난 편하게 돈 벌며 살 수 있는 어떤 준비도 되어있지 않구나' 갑자기 숨이 턱턱 막히며, 두렵고 초조해졌다. 


그제야 내 나이 대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좋은 회사에 취업하는 것이 최고의 목표였고, 20대 후반이 가장 중요한 시기로서, 어떤 회사에 들어가는지가 삶의 난이도를 결정한다고 보는 듯했다. 그리고 돈을 모아 집을 사고 가정도 꾸리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남들이 꾸리려 하는 소중한 일상과, 노력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여태 이해하지 못했던 스펙 쌓기와, 대기업 취직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그들처럼 일상을 꾸리기 위함은 아니었지만 나도 취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당장의 생활비 빚을 갚아야 했고, 앞으로 편하게 살기 위해서, 즉 살기위해서였다. 세상의 요구조건에 맞춰주며, 그곳에 들러붙어 사는 길을 택한 것이다. 딱 한번 배척당하고는 잔뜩 쫄아버렸다. 그렇게 늦었지만 취업시장에 나가게 되었다. 


낮은 학점 때문에 대기업이나, 국내 괜찮은 기업에서는 서류 합격률이 제로에 가까웠고, 수많은 서류 탈락과 면접 탈락 끝에 우연히 외국계 기업에서 면접을 볼 기회가 생겼다. 온갖 아르바이트 경험 때문인지, 아니면 상실감이 영향을 끼쳐 긴장을 하나도 안 해서인지, 나는 면접에서 당당한 태도와 솔직한 언사를 높이 평가받으며 기적적으로 좋은 회사에 취업을 하게 되었다. 이제는 안정적인 삶을 맛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음 편한 사람들, 몸 편한 일, 그리고 이 정도 일을 하고 이런 돈을 받아도 되나 싶을 정도의 월급, 난 처음으로 자본주의 강자(회사)에게 미안한 마음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생활비 빚과 학자금 대출이 월급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며 어느새 이런 생활에도 적응이 되기 시작했다. 


운동은 돈 주고 하는 것이 아니라던 내가, 헬스장을 다니고, 수영장을 다니고, 심지어 태닝까지 했다. 그리고, 차를 사고, 방이 하나가 아닌 집까지 얻게 되었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학자금을 다 갚은 날에는 울면서 혼자 맥주집에서 안주를 시켜 먹기도 했다.(매번 마트에서 제일 싼 맥주를 사서 안주 없이 혼자 먹었기에) 남들에게는 평범한 일상 일수도 있겠지만, 가난하게 살았던 20대를 떠올려보면, 처음 해보는 큰 사치였다. 그렇게 평범한 삶에 적응을 하고 있었다. 남들과 비교해서도 잘 살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이상하게 마음이 허전했다. 뭔가 잃어버리고 살고 있는 것 같았다.



'편안함을 얻고 나서, 내가 가장 사랑했던 녀석을 잃어버렸다'


난 ‘당당함’을 잃어버렸다. 그 녀석을 어디서 잃어버린 걸까? 난 입사 초기와 다르게 아무도 눈치 주지 않았지만 어느새 눈치를 보고 있었고, 직장동료와 회식, 고객사 미팅 등에서 눈치를 보기에 바빴다. 생각이 많아졌고, 말 한마디가 신중해졌기에 말수가 크게 줄었다. 말 한마디가 불러올 온갖 상황을 가정하며 말했고, 소심하다고 여겨지기까지 했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모두 한 마디씩 했다. “와~ 많이 변했네, 이제 사람같네.” 그들은 내가 직장을 다니고 있다는 것에도 놀랐지만, 소심하게 변해버린 태도에 더욱 놀란 듯했다. 나도 이런 내가 싫었고, 당당함을 찾고 싶었다. ‘도대체 그 녀석을 어디에서 잃어버린 것이지?’ 그렇게 왔던 길을 되돌아 보며 한참을 찾았다. 하지만 결국 찾지 못했고, 다만 어디쯤에서 잃어버렸는지 추측을 해보곤 했다.


1. 내가 정의한 세상에서 배신당하며, 난 그곳을 나왔다. 당당함은 애초에 그 세상에 있던 것이었다. 내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2. 가진 것이 없었기에 당당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돈을 벌고, 경제적 안정, 직장 등 가진 것들이 조금은 생겨나면서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겁내는 것들이 많아진 것은 아닐까?


3. 양심을 어겨버렸기 때문이다. 난 당시 인권변호사를 꿈꿨던 만큼 세상의 불의나, 약자들의 문제, 권위적인 인간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항상 녹음기를 들고 다니며, 눈앞에 불의에 참지 않으려 했었다. 그게 내 양심이었고, 해야할 말을 못 하고 돌아 온 날은 한참 동안 괴로워했었다. 그랬던 내가 지금은 눈앞에 가끔 보이는 문제들을 법적으로 문제가 될 것이 아니라며 가볍게 넘어가고 있었다. 귀찮아질 많은 일들을 떠올라, 관례라며 당연하게 눈감아버린 것이다. 심지어 상급자에게 아부도 서슴지 않았다. 


4. 남들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내가 정의한 세상에서는 주변의 누가 뭐라 하더라도 나만 잘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세상이었다. 주변의 우려나 모든 것들은 나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았고, 모든 확률은 50%였다. 

된다 V 안된다. 둘 밖에 없는 선택지, 결과에는 오직 나의 노력만이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하지만, 주변을 의식하기 시작하며,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고 나서 창피함을 느낀 것처럼, 타인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내 또래 사람들 중 잘난 사람을 의식하고, 이 사람 연봉은 얼만지, 어떤 회사를 다니고, 차는 뭘 타고, 이런 것들을 비교하며, 나 또한 남들처럼 그런 비교와 우월감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면서 남들과 강자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5. 열심히 살지 않아서다. 편안한 생활에 익숙해져서 내 양심도 속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받는 돈에 비해 편한 일이라며 미안한 마음에 열심히 일했지만, 어느새 더 편하고 싶어서, 무뎌져서, 열심히 하지 않았다. 그런 내가 당당하게 누구 앞에서 부정이나 불의를 말하려면, 나부터 털어서 먼지 하나 나오지 않을 귀찮은 생활을 해야 하는데, 난 그렇게 힘들게 살고 싶지 않았다. 



‘당당함’ 이 녀석을 찾으러 한참을 걸어 올라갔다. 그러 던 중 지쳐버린 나를 발견했다. 


나는 편안한 생활에 익숙해졌고, 주변의 불의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소리칠 만큼, 나부터 털어서 먼지 하나 나오지 않을 만큼의 귀찮은 생활을 할 각오가 되어있지 않았다. 가장 듣기 싫었던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말을 이해해버리게 되었다. 그냥 적당히, 편하게 더 이상 뭘 하지 않으며, 이렇게 웅크린 채로 있고 싶어 했다.



고작 31살에 이렇게 지쳐버린 이유는 무엇일까?


주변에서 누군가 말했다. “열심히 살아야지, 한창 일할 때인데 최선을 다 해야지! 요즘 애들은 참 히바리가 없어~” 갑자기 울컥하며 따지고 싶었다. '왜 열심히 살아야 하나요? 열심히 살면 행복해지나요?' 일이 꿈이 되어버린 기적을 만나지 못해서 일까? 아니면 너무 열심히 살았기 때문일까? 충분히 열심히 살아봤는데 행복해지지 않아서 일까?’ 아니면, 이렇게 항상 무너지고 깎이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인가. 그것도 아니면 누군가가 나에게 받아들임을 배우라고 하고 있는 것인가.......


난 세상을 다시 배워야 하는 갈림길에 섰다. 19살, 내가 멋대로 정의했던 세상의 향수에서 벗어나 ‘리얼월드’에서 남들과 함께 세상을 살아가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이제 이 세상에서 ‘정의’도 찾고, 내가 가장 사랑했던, ‘당당함’을 찾으러 노력할 것이다. 물론 조금만...... 조금만 더 이대로 웅크리고 있다가 말이다. 


결국 난 결론 내지 못했다. 내가 좋아했던 드라마들의 해피엔딩처럼, 시원하게 답을 내렸으면 참 좋으련만……… 깔끔하게 ‘난 이렇게 살기로 했다!’ 라며 멋지게 대안을 제시했으면 좋으련만. 나의 31살은 아직 그런 답을 내리기 힘든, 어리고 미숙한 나이인가 보다. 어릴 적 그렸던 나의 30대는 어른스럽고, 모든 것이 안정적인 그런 멋스러운 나이였는데, 그렇게 되길 바랬는데…… 


멋진 마음은 과거였고, 지금은 나만 생각하는, 비겁한 어른이 거울 앞에서 날 보고 있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모르겠다. 삶도, 세상도…… 그래도 다시 당당한 어른이, 아니 최소한 비겁하지 않은 어른이 되는 내일을 꿈꾸며, 글을 쓰고, 나를 돌아본다. 


기나긴 추억여행을 끝내고 다시 몽돌해변으로 왔다. 


나뿐만 아니라 어떤 어른들에게도 뾰족했던 때가 없었을까. 하지만 세상을 겪으며, 사회를 거치며, 가정을 가지며 모두가 깎이고 잘려나가며,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늘어 갔으리라..... 


 

   몽돌 



또 저놈의 파도가 몰려온다


난 뾰족한 채로 있고 싶었는데


어느새 돌아보니 모두 몽돌이 되어 있었다



- 진창의 19년 10월 19일의 별빛과 바다가 쓴 시 中 -






에필로그


어떤 남자가 등산을 하고 있었다. 그는 네발로 등산을 했다.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등산로 아닌 길을 걷고 짚으며 올라갔다. 마치 그 길로 가야만 무언가를 찾을 수 있다는 듯이, 또 그게 훨씬 재밌고 빠를 것이라 믿으며 올라갔다. 그러다 몇 번 넘어져서 다치고 길까지 헤매면서, 그제야 커다란 겁이 닥쳐오기 시작했다. ‘밤새 이렇게 산을 헤매고만 다니면 어떡하지?’, ‘정상까지 평생 못 가면 어떡하지?’ 그런 두려움 때문에 그는 뒤늦게 눈앞에 보이는 커다란 등산로로 뛰어 들어갔다. 그렇게 처음에 먹었던 마음을 포기한 채 남들처럼 발을 맞추고, 간격을 맞추며 같이 걸어갔다. 더 이상 손을 짚으며 힘들게 올라갈 필요도 없었고, 천천히 걷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편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다시 또 그 길이 그리워졌다. 그때가 아팠지만, ‘조금만 더 참고 올라갔으면 어땟을까?’라는 생각이 떠오르게 된 것이다. 이 등산로에서는 내가 찾던 무언가를 찾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남들과 발맞춰 걸으며 준비를 하고 있다. 언젠가 다시 네발로 험한 산길을 올라갈 그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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