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비행의 끝
긴 비행의 끝이 다가올수록, 이상하게도 비행이 끝나가는 것이 아쉬웠다. 다시 일등석을 타볼 수 있을까? 아쉬움이 스쳤다. 비행 내내 누렸던 특별한 경험들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영화속의 일들처럼 느껴졌기 때문일까. 설렘과 약간의 흥분을 안고 비행기에서 내렸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의 차가운 공기가 폐 속으로 스며들었다. 한국과는 다른, 낯선 공기의 감촉이었다. 수하물 찾는 곳으로 향하는 동안, 주변의 풍경들을 눈에 담았다. 독일어로 된 안내 표지판, 낯선 얼굴의 사람들,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했다. 컨베이어 벨트가 돌아가기 시작하고, 기다리던 짐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비행기의 많은 짐 중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우리의 분홍 돈키호테 비닐 가방이었다. 첫번째로 나오면서 유독 눈에 띄는 그 모습에, 왠지 모를 웃음이 터져 나왔다. 우리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유쾌한 신호탄처럼.
게이트를 빠져나가는 순간, 익숙한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내의 친구 부부였다.(실제는 실버 부부라칭한다.) 지구 반대편에서 살고 있지만, 불과 몇 달 전 한국에서 따뜻한 겨울을 함께 보냈기에, 낯섦보다는 반가움이 훨씬 컸다. 서로를 발견한 순간,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향했고, 환한 미소와 함께 짧은 포옹을 나누었다. “잘 지냈어?”, “정말 보고 싶었어!” 짧은 인사말 속에는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과 따뜻한 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짐을 모두 차에 싣고, 실버 부부의 새로운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국에서의 이야기, 프랑크푸르트에서의 생활 이야기, 그리고 앞으로의 여행 계획까지.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프랑크푸르트의 야경은 낯설고도 매력적이었다. 마치 잘 정돈된 레고 블록으로 만든 도시처럼, 반듯하고 깔끔한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한국의 도시들과는 다른, 유럽 특유의 고풍스러움과 현대적인 감각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풍경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마치 영화 세트장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풍경들을 바라보며, 우리는 앞으로 이 도시에서 어떤 시간을 보내게 될지 상상했다.
실버 부부의 집은 프랑크푸르트 외곽의 조용한 동네에 위치한, 정원이 딸린 아름다운 빌라였다. 새로 지은 집이라 모든 것이 깨끗하고 현대적이었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은은한 조명과 아늑한 분위기가 우리를 맞이했다. 실버부부는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집에, 한국에서 손님이 온 것은 우리가 처음이라고 했다. 왠지 모를 뿌듯함과 함께, 이렇게 따뜻하게 우리를 맞아주는 이들에게 다시 한번 고마움을 느꼈다. 우리를 위해 준비된 방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편안한 매트리스와 깨끗한 침구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마치 호텔에 온 것처럼, 편리하게 잘 갖춰져 있었다. 실버부부가 정성껏 준비해 준 저녁 식탁에는, 독일 음식과 함께 한국에서 가져온 몇 가지 반찬들이 함께 놓여 있었다. 오랜만에 먹는 집밥의 따뜻함과, 친구들의 정성이 느껴지는 음식들을 맛보며, 우리는 비행의 피로를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하지만 시차는 쉽게 극복되지 않았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었지만, 밤이 깊었음에도 잠이 오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한국 시간으로는 새벽 시간이었다. 눈은 말똥말똥했고, 온통 새로운 풍경들로 가득한 이 도시가, 내가 정말 유럽에 와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창밖을 내다보니,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모양의 건물들과 가로등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고요한 밤 공기 속에서, 멀리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만이 이 곳이 낯선 도시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마치 다른 시간 속에 갇힌 것처럼, 몸은 피곤했지만 정신은 깨어 있는, 묘한 밤이었다. 어쩌면 새로운 환경에 대한 긴장과 설렘, 그리고 시차로 인한 혼란이 뒤섞인 감정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리저리 뒤척이다 겨우 잠이 들었지만,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다시 눈이 떠지고 말았다. 그렇게, 프랑크푸르트에서의 첫날밤은 낯선 풍경과 시차의 공격 속에서, 어색하고도 특별한 기억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