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이 가져다 준 만남
간신히 새벽녘에 잠이 들었지만, 시차는 몇 시간 만에 나를 깨웠다. 몸은 여전히 한국의 시간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듯 뻐근했다. 무심코 휴대폰을 확인했을 때, 뜻밖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인스타그램에 올린 내 스토리를 보고, 또 한 명의 독일 인연이 연락을 해온 것이었다. J였다. 루프트한자 승무원. 1~2년에 한 번, 드물게 참석하는 모임에서 꾸준히 만나온 사이지만, 단둘이 마주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조금은 어색한 사이.
하지만 J는 붙임성 좋고 싹싹했다. 모임에서 내가 어색해하거나 지루해할 때면, 어김없이 말을 걸어주고 분위기를 풀어주곤 했다. 그런 J가 내가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한 것을 알고, 자신도 비행 대기 중 머물고 있던 차에 연락을 준 것이었다. 메시지에는 프랑크푸르트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인사와 함께, 시간이 괜찮다면 함께 얼굴을 보자는 제안이 담겨 있었다.
프랑크푸르트에 오기 전, 실버부부로부터 그곳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었다. 전쟁 이후 빠르게 재건된 탓에 다른 유럽 도시들에 비해 현대적인 모습이 강하고, 역사적인 유적지보다는 금융 중심지로서의 이미지가 더 강하다는 것. ‘꼭 봐야 할’ 명소는 많지 않지만, 도시 곳곳에 숨겨진 매력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을 거라고 했다. 여행 직전에 보게 된 드라마, ‘눈물의 여왕’의 촬영지가 프랑크푸르트에 있다는 것을 알고, 그곳을 방문하는 것을 작은 일정 중 하나로 추가해 두었었다. 나름의 계획이 있었지만, 갑작스럽게 J를 만나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먼 타국에서 먼저 손을 내민 친구의 호의를 쉽게 거절하기 어려웠다.
아내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했다. “J한테 연락이 왔는데, 프랑크푸르트에 있다고 같이 시내 구경하자고 하네.” 아내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J? 아~ 그 루프트한자 승무원?”이라고 되물었다. J가 속해있는 모임은 오래된 모임이었기 때문에 아내도 J를 알고 있었다. 실버부부를 나보다 더 잘 아는 아내는 솔직하게 말했다. “실버부부가 낯을 좀 가리는 편이라, 모르는 사람이 함께 있으면 조금 어색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아내의 말에 나 역시 잠시 고민했다. 모두가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혼자 잠시 J를 만나 커피를 마시고 돌아오기로 결정했다. 프랑크푸르트 시내가 그리 넓지 않으니, 아내와 실버부부가 시간을 보내는 동안 잠시 짬을 내어 J와 만나기로 마음을 정한 것이다. 이 사실을 실버부부에게 이야기하자, 예상과는 전혀 다른 답변이 돌아왔다. “아니, 프랑크푸르트에 사는 한국인이면 만나야지! 뭐하러 고생해! 여기서 한국 사람 만나는 건 정말 특별한 인연인데!” 타지에서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한국에서만 살아온 우리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그들의 말에 우리는 모두 함께 만나기로 결정했고, J에게도 이 사실을 전했다. J는 흔쾌히 승낙했고, 우리는 드라마 ‘눈물의 여왕’의 배경으로 유명해진 “아이젤너 다리”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약속 시간, 우리는 아이젤너 다리 위에서 J를 만났다. 드라마로 유명해진 탓에 인파가 많은 다리위에서 J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멀리서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어색할 거라고 예상했던 분위기는, 다양한 공통 화제와 J의 붙임성 덕분에 금세 편안해졌다. J가 추천해 준 다리 근처의 노천 카페에 자리를 잡고 커피와 프랑크푸르트의 명물 케이크를 맛보았다. 바로 옆 광장에서는 악사가 바이올린 선율을 연주하고 있었다. 낮은 유럽풍 건물들 사이로 햇살이 쏟아지는 오후, 오랜만에 만난 인연들과 함께 듣는 바이올린 연주는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카페에서의 시간을 뒤로하고, 우리는 저녁 식사를 위해 이동했다. 실버 부부가 미리 알아봐 둔, 독일 전통 양조장 겸 레스토랑이었다. 무엇을 먹고 싶냐는 질문에 나는 슈바인학센과 맥주를 이야기했고, 실버 부부는 그 두 가지를 모두 즐길 수 있는 곳을 골라두었다. 커다란 양조장은 독일 현지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는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프랑크푸르트의 오후 공기를 즐겼다. 얼굴보다 훨씬 큰 맥주잔에 담긴 시원한 맥주와,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게 잘 익은 학센, 그리고 푸짐한 감자와 소시지. ‘독일’다운 풍성한 저녁 식사였다. 날씨까지 완벽해서, 더할 나위 없는 저녁이었다. J는 마치 오랜 친구처럼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만나기 전의 걱정은 무색하게, 저녁 식사는 시종일관 웃음과 이야기로 가득했다.
계획에 없던 만남이 가져다주는 기쁨은 컸다. 우리 부부에게도, J에게도, 그리고 실버부부에게도, 그날 저녁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늦은 시간, 다음 기차를 기다리며 J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나서, 우리는 모두 함께 만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의 우리의 첫 일정은 기대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마무리되었다.
인연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자주 보지 못했던 사람을, 프랑크푸르트라는 먼 타지에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평소 인연을 어렵게만 생각했던 나의 인식이 바뀌게 된, 소중한 경험이었다. 우연처럼 다가온 만남이, 여행을 더욱 풍성하고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것을 경험하며, 앞으로의 여정에 대한 기대감을 키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