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즈비언 에세이> 마성의 레즈

by 박에녹



나는 마성의 레즈다.


뻥이다.


그저 마성의 레즈가 되고 싶은

한낱 평범한 레즈비언일 뿐이다.


나는 여자를 사랑하는 여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자를 꼬시는 일은

존나 어렵다.



작년 3월의 어느 날

혼자 락페스티벌에 갔다.


같이 갈 사람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집에 있기엔

라인업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그냥

혼자 갔다.


공연 하나를 보고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너무 외로웠다.


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

나처럼 혼자 온 레즈가

한 명쯤은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어플에 글을 올렸다.


<나 지금 OO 락페인데 같이 맥주 마실 사람 있어?>


댓글이

바로 달렸다.



맥주 부스 앞에서

그녀를 처음 봤다.


한눈에 보기에도

예쁜 여자였다.


우리는 맥주를 들고

사람들 틈에 섞여 공연을 봤다.


베이스가 울릴 때마다

바닥이 둔하게 진동했고

사람들은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고 있었다.


공연장은 열기로 가득 차

거의 들썩이고 있었다.


우리는 어느 순간

서로 가까이 붙어 서 있었다.


말을 하려면

귀에 입을 가까이 가져가야 했다.


그럴 때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내 얼굴을 스쳤다.



모든 공연이 끝났을 때

밤은 이미 깊어 있었다.


3월의 밤공기는 꽤 차가웠지만

공연의 여운 때문인지

둘 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택시는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우리는 한참을 서 있었다.


그녀는 합정에서

약속이 있다고 했다.


겨우 잡은 택시에

함께 올라탔다.


합정역 앞에서

그녀가 내렸다.


나도 따라 내렸다.


그냥 그렇게

헤어지기엔

왠지 조금 아쉬웠다.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말했다.


“번호 교환할래요?”


우리는 번호를 교환했고

그렇게 헤어졌다.



나는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근처 레즈 클럽에 들어갔다.


새벽 두 시쯤

그녀에게 메시지가 왔다.


“언니 어디예요?”


“제가 거기로 갈게요.”


솔직히 말하면

반쯤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진짜 왔다.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그녀가 내 쪽으로 걸어왔다.


“진짜로 올 줄 몰랐죠?”


네온이 깜빡이고

섬광이 지나가듯

그녀의 얼굴이 순간 순간 드러났다.


심장이

덜컥 뛰었다.



새벽 다섯 시쯤

우리는 같이 클럽을 나왔다.


골목은 아직

밤이 끝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거리에는 젊은이들이 가득했다.


누군가는 크게 웃고 있었고

누군가는 비틀거리며 걸어가고 있었고

누군가는 아직 집에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골목 한쪽에 서서

담배를 피웠다.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었다.


나는 그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때 어떤 여자가 다가와

우리를 번갈아 보더니

그녀에게 물었다.


“애인이에요?”


그녀가

잠깐

망설였다.


그 짧은 순간

내 머릿속은 완전히 뒤엉켰다.


설렘과

조심스러움과

기대와

겁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리고 그 순간


내 입이

먼저 열렸다.


“아니에요.”


바로 후회했다.


그리고 곧 깨달았다.


마성의 레즈는

여자를 잘 꼬시는 사람이 아니라,


이런 순간에

“아니에요.”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그날도

마성의 레즈가 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