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의미 없이 도파민 충족을 위해 인스타그램 피드를 쓱쓱 내리고 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귀엽고 삐뚤빼뚤한 손글씨 주인의 피드 가득한 힘없고 수수하며 유유자적한 것들을 구경해봅니다. 안빈낙도를 추구하며 영원히 독기없이 살고픈 제 추구미와 결이 일치합니다.
어찌 됐든 저는 정체도, 정확한 의도도 모르는 이 사람에게 단숨에 홀려버리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편지를 받아버려면 약간의 참가비가 필요했으나 누가 고작 편지 보내는 값 7000원을 삥 뜯으려고 2년 동안이나 자기 피드에 컨셉질을 하겠나 싶어서 뇌도 안 거치고 시키는 대로 입금했습니다. 직업이 예술 쪽이나 일러스트레이터신것 같아요. @youhaeyo
(가입 2024년 10월)
그로부터 약 3주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깟 7000원은커녕 1700원짜리 커피에도 벌벌 떠는 사람이라 아예 잊고 산 건 아니지만,,늘 그랬듯이 카스 피쳐 하나 사 먹었다고 치죠 뭐.
어느 날 우편함에 기다리던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정성스럽게 꾹꾹 눌러쓴 손글씨는 숲 속에 사는 토끼나 다람쥐가 쓴 듯 무해하고 유치하고 어딘가 요상한 기운이 가득했습니다.
이런 느낌
편지는 조금만 보여드릴게요. 남이 소중하게 써 준 편지를 공개하는건 실례겠지요.
이것은 손잡이가 두꺼운 머그컵을 그린 낙서의 한 구절입니다. 별 의미 있는 그림은 아니지만 편지를 받은 당일 아침에 요런 굽 있고 지점토로 빚은 듯 투박한 어글리 도자기컵을 사야겠다고 마음먹었어가지고요. 신기하군요..
나머지 내용도 죄다 영양가 없고 심각하지 않으며 그 어떤 문제의식이나 목표도 없는 귀여운 것들입니다.
편지는 총 두장입니다. 다른 한 장은 손글씨가 아닌 일종의 광고나 신문 같은 형식입니다. 그리고 이메일 주소와 큐알 코드가 인쇄되어 있습니다.
큐알코드를 인식하면 애플뮤직 플레이리스트로 이동합니다. 총 41분짜리 희망과 사랑 코어의 재생목록들입니다.
취향을 공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편지도 소중하게 간직할게요.
아래 문장들은 제 블로그에는 따로 올리지 않은 글입니다. 아무래도 브런치가 더 프라이빗한 공간이다 보니 여기에만 추신을 덧붙이겠습니다.
사실 저는 아무런 기대와 목적 없이 살고 있습니다. 하고 싶은 것도 없고, 타고난 기질과 에너지도 하찮으며 극도의 우울증을 앓은 지 오래됐지만 겉모습만 보면 아무도 몰라요.
괜히 힘들어 죽겠다고 전혀 상관없는 남한테까지 관종짓, 에너지 뱀파이어짓은 안 합니다.어쩔 수 없게도 착실하게 책임과 수습을 반복하면서 살고 있답니다. 단지 음흉하고 교활하게 멀쩡한 척 잘 숨기고 사는 거죠. 이런 저에게 잠시라도 이세계의 요정이 나타나 가끔은 너의 인생에 이런 뜬금없는 이벤트도 생긴단다라고 말해주고 간 것 같네요. 잠시 즐거웠습니다. @youhaeyo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