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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셀라 Aug 18. 2023

착한 며느리 탈출기 01

내게 최선이 누군가에게 최선이 아님을 안다.


남들이 들으면 사소하게 넘어갈 일이었지만 이것을 삼키면 또 그동안의 일들을 삼켜야 했다. 약해질대로 약해진

나에겐 역부족이었다.


그래도 무릎 수술을 하시고 장례한지 3개월 정도이니 혼자계신 분이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전에 있었던 일을 뒤로하고 아이 목소리라도 들려드려야겠다 싶어 시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함께 기도하자는 말에 어머니가 대뜸 이전일을 꺼내셨다.


“얘, 나 그 때 안 웃었어.”


맥락없이 튀어나온 말이었다.

2달도 더 된 일을 다시 한 번 꺼내셨다.

어머니는 동서에게 섭섭한건 그냥 넘어가셔도

나에게 섭섭한게 생기면 분이 풀릴 때까지

나에게 잘 못했다는 소리를 들으셔야 하는 분이다.


일례로 약 5년 전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인디안 같이 생겼다, 허벅지가 아주 튼실하고 두껍다는 말이 불편해 몇 년만에 이야기를 꺼냈을 때

어머니는 다음 날 나에게 전화를 해

대뜸 고래고래 소리 지르셨다.



내가 왜 너한테 그런 소릴 들어야 되니?


나는 분명 웃으며 이야기 했는데.

누가 들으면 내가 쌍욕이라도 한 줄 알았을 것이다.


그 순간 너무 어이가 없어 어머님이

저를 맘에 안 들어하시는 건 알아요.

이전에 같이 다니던 교회에서 뒷담하시던 것들도

다 돌고 돌아 들었어요.


그랬더니 시어머니 인사도 안하고 무시하는게

그럼 잘 한 일이니? 하신다.

그때 나와 남편은 결혼도 하지 않았고

나는 어머님께서 친구분들과 대화를 나누실 땐 조용히 지나가곤 했다.

어머님이 친구들과 대화할 때

어린 친구들이 어머님을 크게 반겨주고 끼어드는 일로

어머님의 동년배분들께 자랑하고 싶어하신다는 것은

결혼하고 몇 년 뒤에나 알게 된 사실이다.

어렸던 나는 왜 미움받는지 알지 못 하고

그저 맘에 안 드실수도 있지 하며 불편하지 않게 대했다.


격없는 사이를 원하시는 어머님께 나는

흔히 엄마라고 부르며 다가오는 남편의 친구들과

늘 비교대상일 수 밖에 없었다.

남편은 남녀 가리지 않고 친구가 많았다.


나도 어르신들에겐 거리낌없이 편한 편이지만

나에겐 일단 엄마가 따로 있었으며

남자친구의 어머니에게 격없이 하는건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샤이하고 눈치를 많이 보는 성격도 반영되었을 것이다.


어머님께서 여기저기 얘기하는 걸 들으셨는지

어머님과 함께 참여하던 성가대 지휘자님이

나를 따로 불러 괜찮냐고 물어보기도 하시고

눈치빠른 1청년, 30대 이상의 언니들이

책이며 옷이며 챙겨주며 늘 안타깝게 여기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어머님을 챙기는 나를 대견하게 여겼다.

그들의 사랑의 힘입어 나도 그런 작은 잘못따위야

하고 넘기며 어머님을 사랑으로 섬겼다.

이건 어머님도 아시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때 통화하며 어머님께선

니가 인사 안하고 뻣뻣하게 굴어서

뒷담도 했고 니가 맘에 안들기도 했다며

오히려 큰 소리 치셨다.


어이가 없었다.



아기같은 어머님의 반응에 그저 웃음이 픽 나왔다.

그래서 그냥 무조건 잘못했다고 했다.

한 열번 정도 어머님께서

그리고 저번에 눈 똑바로 뜨고 얘기하고! (죄송해요)

니 애한테 콜라 먹였다고 섭섭하게 말하고! (잘못했어요.)

이런식으로 어머님께서 분이 풀리실 때까지

사과한 후에야 정신이 드셨는지 사그라든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그래 잘못한 줄 알았으면 됐다

못 마땅하지만 더 이상 이길수가 없겠다 싶으셨는지

전화를 끊으셨다.


다음에 만났을 땐 어색한 어머니에게

괜히 더 살갑게 굴었다.

그 때 나는 남편을 진짜 사랑했나보다.





그렇다면 지금은?

남편은 지난 몇년간 나와 보내는 시간보다

어머님과 함께 일하며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둘이 데이트하거나 세가족이 있는건 드물었고

항상 중간에 어머님이 계셨다.

힘들때마다 혼자 삭히며 지나가다보니 천천히 정이 떨어진지 오래되었다.



그래서 일까?

이번엔 어머니께 잘못했다고 빌기가 싫었다.


“아니요 저는 잘 못 들은게 없어요”


그러니 어머님의 분이 속사포처럼 떨어졌다.


그러면 내가 거짓말을 했고 이 상황을 만들어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니?


입을 다물었다.

통제력이 뛰어난 어머님께서 남편에게 어떻게 입단속을 시키시는지 나는 잘 알았다. 도련님에겐 이렇게 말해라 시아버님에겐 이렇게 말해라 동서 왔을 땐 이렇게 해라 이 사실을 말하면 걔네가 얼마나 난리가 나겠니.

이런 상황을 10년 넘게 겪어온 나였다.



사실 내가 면접에서 떨어진 일로 어머님이 웃으셨건 안웃으셨건 상관없었다.

나는 분명히 들었으니까.


그 여부와 상관없이 나에게 자신의 상황을 고집하시며

통제하려고 하는 어머님의 행동에 잘못했다며 끌려가게되면 , 이걸 삼키면 - 이전에 있었던 많은 일들을 다시 삼켜야 했다.


그러지 않기로 했다.


남편과의 이혼계획을 언급했다.

나는 아주 오랬동안 고민했다.

변호사를 찾아갔다가, 살갑게 구는 남편을 보며

그래 가정을 지키자며 몇 번이고 돌아섰다.


내 아들 볶지마라!



와중에도 철저히 시어머니 같은 발언이다.

나는 이혼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남편의 저녁상을 차리고

생활비를 줄이기 위해 애썼으며

살기위해 시댁의 빚을 짊어지고 개인회생을 선택했다.

물론 어머님은 그런 나는 안중에도 없었다.


“전 최선을 다했어요”


그러자 시어머니라면 당연하게 나올 말들이 튀어나온다.



니가 한게 뭐가 있니!
너는 내가 불편한게 있었을거라곤
생각안하니?



순간 어이가 없었다.

왜 생각 안했겠어요.

그러니까 이만큼 참았지.



다른 사람들이건 석희네 친가건

너 대단하다며 칭찬만 하는데

네 가식을 좀 봐라.


그래, 늘 그게 불만인 분이었다.

그래서 내가 맘에 안들어도 내치진 않았다.

주변 안목이 중요하니까.


어머님이 말씀하시는 동안

마음이 점점 고요해졌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남편과 어머니는

나에게 이렇게 말 할 수 없다.

라는 강한 분노와 함께 차분해졌다.


다시 한 번 얘기했다.


“저는 최선을 다했어요“


다시 한번 속사포 같은 분노가 쏟아졌다.


“제가 더 이상 듣고 있을 필요가 없네요.”



그러자 어머님께선 빠르게 꼬랑지를 내리셨다.


그럼 그래

이혼하던 말던 니네 알아서 해

지독한 것



‘지독한 것’이라는 말로 전화가 끊어졌다.


눈물이 흘렀다.

어리고 어리석었던,

10년간의 세월이 떠올랐다.


속은 더 답답했다.

누구나 상대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어한다.

나도 좋은 사람, 착한 며느리가 되기 위해

그렇게 바보같이 살았다.




대화 도중에 들어와 듣고 있던 남편이 한마디 했다.


잘 얘기했어.

잘 했어.



이 일이 있은 직후 그의 행보를 보면

저 말이 진심이었는지,

헤어지지 않기 위해 본능센서가 켜진 것인진 모르겠다.



나는 하염없이 울었고

남편은 그런 내 옆에서 떠들며 맥주를 마셨다.


그때 처음으로 남편이 든든하게 여겨졌다.


나는 시어머니의 딸이 아니었다.

누가봐도 이건 투닥거리는 정도의 싸움이 아니다.

일방적인 속사포 공격이다.



많은 실수하는 어른과 만나 용서하고 포용하기도 했지만

어머님은 나를 인격적으로 가장 낮추신 분이었다.


하나님, 저 더이상 못 하겠어요.

살면서 한번쯤은 합리화가 아닌 제대로 된 사과를 듣고 싶어요.

제가 잘못하지 않은 일들에 잘못했다고 말하며 살지 않을거에요.


그렇게 40일간 작정기도를 하고 난 후의 전화였다.

사과는 듣지 못했지만 아닌 일에 잘못했다고 하지 않을 용기는 생겼나보다.

그래 나의 최선이 누군가에겐 최선이 아니다.

나는 그들에게 더욱 최선을 다해야 겨우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었고 더 이상은 최선을 다 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떠나야 할 때가 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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