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여행 #06
오랜만에 쓰는 퇴사 후 여행 이야기.
한국에서 퇴사 날 오후 6시까지 정식 근무를 마치고 송별회 후 집으로 향했다. 다음 날 오전 10시 비행기를 타기 위해 나머지 짐을 싸고 뜬눈으로 밤을 새운 후 오전 6시 집을 나섰다. 집에서 공항까지는 1시간 반 남짓. 가는 동안에도 잠은 오지 않았다. 퇴사 후 여행의 시작은 잠들지 못하는 하루하루의 연속이었다.
미국 워싱턴디씨에 도착한 것은 비행기를 타고 15시간 정도 후였다. 비행기 안에서도 와이파이 연결해서 블로그 포스팅을 하고, 잠은 4~5시간 잔 것이 전부였다. 미국 디트로이트 공항에 도착한 후 입국 수속을 밟고 다시 국내선을 타고 워싱턴디씨로 향하는 길. 오후 2시 정도 워싱턴디씨에 도착했다. 마치 당일 아침에 출발해서 오후에 도착한 것 같은 양상. 집에 캐리어를 내려놓고 쉼 없이 돌아다녔다. 이틑날도 한국에서와 동일하게 미국 시간으로 오전 7시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했다.
그렇게 3일이 되었을 때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다. 4일이 되어서도, 5일이 되어서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오전 7시에 눈이 떠졌다가도 다시 잠이 들었고, 오전 10시~11시 사이에 일어나 느지막이 씻고 카페로 향했다. 쉼 없던 삶에 쉼이 오니 급격히 피로해졌고 무기력해졌다. 집주인이자 친구는 '내일 스케줄이 뭐야'라고 연일 물었는데 그 질문마저도 싫었다. 나는 그저 쉬고 싶었다. '스케줄 따위 없다고!!'
한국에 있는 동안 단 하루도 쉰 적이 없다. 회사 업무, 블로그 포스팅, 영어공부, 책 읽기, 영화 보기, 마케팅 스터디 모임 등 그 누구 하나 시킨 적은 없지만 해야 했고 해야만 했다. 하지 않으면 뒤처지는 것만 같았다. 누워서 뭉그적거린 지 일주일 만에 친구에게 전화해 하소연했다. '내가 지금 블로그를 열어보지도 않고 있어! 내가 개봉작을 챙겨보지 않고 있어!' '내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아!' 쉼에 대해 불평불만 늘어놓는 나에게 친구는 정답을 내뱉었다. '언니 쉬러 갔잖아요. 그냥 쉬어요.' 그래서 브런치도 많이 늦어졌다. 퇴사 후 여행은 그럴듯한 이야기를 남길 것 같았지만 실상 퇴사 후 3일째 되는 날부터 일어나 걷고 앉아서 먹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보다 누워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퇴사하고 바로 다음날 날짜로 비행기 티켓을 예약한 이유는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퇴사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1) 이직 준비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도 2)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는 의무감도 3) 모임에 참석해야 한다는 의무감도 4) 트렌드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압박감도 5) 나이와 성별을 생각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모두 벗어던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워싱턴디씨는 그런 면에서 나에게 완벽했다.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다독여 줄 선배들도 있고. 뉴욕과 달리 부산스럽지 않고. 사람들은 적당히 친절하고. 익숙한 거리와 편리한 교통편. 그리고 무엇보다 좋아하는 공간이 많다.
퇴사 후 여행 넷날, 집에서 천천히 걸어 나와 조지타운 방향으로 향했다. 바로 그곳에 내가 좋아하는 공간인 동네서점이 있기 때문이다. 다리 바로 옆에 위치해서인지 서점 이름마저도 Bridge Street Books 브릿지 스트리트 북스이다.
워싱턴디씨에서는 개성 강한 동네서점들을 종종 만날 수 있다. 덕분에 각 동네마다 괜찮은 서점 찾기를 하고 있다. 워싱턴디씨를 다섯 번 방문하며 꼽아 놓은 동네서점 중 브릿지 스트리트 북스는 단연 으뜸이다. 2층으로 된 가정집 분위기의 브릿지 스트리트 북스는 규모는 크지 않지만 카테고리별 구성이 꼼꼼하고 특히나 자연 채광이 들어와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다른 때 같으면 책을 사야만 할 것 같은 압박감에 코너 곳곳을 맴돌았겠지만 활자와도 당분간 안녕. 동네서점에서 좋은 기운을 받는 것만으로도 하루를 완벽히 마감했다. 토닥토닥.
퇴사 후 여행을 하며 이직에 대한 불안감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정말 한국에서만큼은 아닌 것 같다. 이직에 대한 생각보다는 온전히 나를 바라보는 시간이 더 많아진 것 같다. 나는 누구이며, 나는 무엇을 잘 하며,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