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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velyanna Apr 23. 2019

엘 칼라파테 빙하, 한 걸음이면 충분해

실패는 두려움이 아닌 까닭에


시퍼렇게 멍이 든 양 쪽 발목과 욱신거리는 허벅지, 맨소래담을 온몸에 펴 발라야만 할 것 같은 지금의 몸 상태에 기분이 묘하다. 생의 처음인 것들을 만나고 돌아온 꿈같은 시간. 오늘은 이 뜨거운 기억이 기록을 지배하겠다 싶다.


언제부턴가 무슨 일이든 지독하게 열심을 품는 나를 잃었다. 다이어트를 하겠다고 굳게 마음먹고 독하게 빵과 과자를 끊었던 그 몇 해 전을 끝으로 나는 스스로에게 애쓰기를 멈추었다. 겉으로는 두 주먹 불끈 쥔 당찬 아이 같아 보였을지 몰라도 진심은 무언가 시작하는 것이 매우 겁나는 겁쟁이였다. 새로운 시작에 독해지고 싶지 않았다. 행여나 도전하는 어떤 것에 재능이 없는 나를 발견한다거나 어리바리한 스스로를 마주하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 가장 버거웠던 건, 부족함을 스스로 인정해야 하는 것. 무엇이라도 잘 해내지 못하는 나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못하는 것 없다 생각했던 만능 재주꾼 대장부였던 어린 시절엔 도전도 시작도 새로움도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내 세계가 넓어지고 부딪히는 세상이 커지며 나는 종종 실패했고 지고도 살았으며 최고라는 타이틀은 지속될 수 없음을 알았다. 그 후 새로운 것들은 나에게 조금 두려웠고 기존의 인정함 앞에 더 이상 독하게 굴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시간이라는 숫자가 나이를 업고 오면서 굳어버린 몸과 사고방식에 굳이 애를 써 새로운 것들로 채우고 싶지 않았다. 합리화는 무척이나 쉬웠고 나이를 먹어가니 그런 핑계가 모두를 기꺼이 이해시켰다.


그런데 정말 매우 오랜만에 독한 마음이 솟았다. 두 발에 힘을 주고 한 걸음 내딛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며 앞으로 한 발 나아가는데, 이 얼음덩이의 거대함 앞에 버티고 견디며 끝까지 해내고 싶어 졌다. 한참을 눈비와 함께 빙하 위를 뛰다시피 걸으며 지나온 시간을 훑어보니 그동안 안 보이는 척 못 본척하며 피해온 나의 순간들이 떠올랐다. 실패가 두려워 피하고 덮어두고 외면하며 욕심을 내지 않은 시간들이 처음 마주한 거대한 얼음덩어리 속에서 부끄러워졌다.


세 시간 내도록 얼음을 밟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래 한 걸음, 한 발 이거면 충분했다. 한계를 받아들이고 약함을 인정해야 하는 시간이 버거웠던 그 마음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내가 내게 토닥여 주었다. 가슴에 담긴 무거운 부담감을 털어내자 몸도 가슴도 한결 가벼워진다. 두발에 묵직한 아이젠을 차고 신나게 빙하 위를 내달렸다. 내가 사는 만큼이, 내가 밟는 만큼이 나의 세상이고 나의 세계였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행여나 시작한 도전이 실패할 수도 있고 노력을 해도 되지 않는 나의 한계도 있고 내가 만나는 모든 이에게 인정받는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게 되고 세상엔 나보다 잘나고 뛰어난 사람이 있다는 것도 인정하게 되지. 그렇게 잦은 내 부족함은 어느 순간 강한 맷집이 되어 삶의 유연한 자리에 나를 앉혀놓곤 해. 딱딱하고 이기적이던 삶의 모서리가 둥글게 깎여나가 동글동글한 시간들을 쌓아가는 것. 동그란 나의 세상 안에 나만의 것들을 채워 놓고 사는 것. 어쩌면 그게 삶인 거 같아. 괜찮았어 오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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