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호> 3

by 남몰래

한낮의 바다는 뜻 없이 펼쳐져 있었다. 뜨겁게 해를 품거나 찬란한 달빛을 비추는 일 없이 그늘 아래 조용히 잠자는 푸른 송아지 같았다. 우리는 모래사장 끝에 놓인 보도블록 경계석에 걸터앉았다. 아침 해는 2교시를 마친 아이들 얼굴처럼 심드렁했고 초겨울이었지만 코트가 거추장스러울 만큼 따뜻해 관성의 법칙 대로 바다만 봐도 좋을 날씨였다. 바다는 바람의 크기에 따라 끝자락이 하얗게 펄럭이다 가라앉는 일을 반복했는데 그조차 미세해서 나는 바다가 숨은 쉬고 있는지 궁금해 종종 귀를 갖다 대곤 했다.

“조용한 것들은 자꾸 들여다보게 돼.”

바다를 보던 그가 말했다.

“어릴 때부터 눈 뜨면 가장 먼저 창문 너머로 바다를 봤어. 봐도 봐도 끝이 없는 게 좋았거든. 보고 있으면 마음이 놓여. 아무리 세어도 바다의 물방울을 다 세지 못한다는 게 말이야. 자주 그런 상상을 했어. 아침에 일어나면 소중한 게 사라지고 없는 거야. 그건 내 뜻이 아니야. 지난밤 나의 잘못도 아니지. 그런데 눈 떠보니 없어. 끝인 거야. 조용한 것일수록 그래. 매일 오던 고양이가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오지 않아. 괜찮다고 정말 괜찮다고 조용히 웃던 사람이 아침이 되면 가고 없는 거지. 밤새 그런 꿈을 꾸면서 잠을 자. 버스를 기다리다가도, 밭에서 일을 하다가도, 부처님을 만나러 가서도 나는 바다를 찾아 두리번거려. 바다 깊은 곳엔 뭐가 있을까.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모두 거기 모여서 영원히, 끝없이 살고 있지 않을까. 아침에 바다를 보고 오는 길엔 네가 가고 없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너는 업어 가도 모르게 자고 있더라. 그래서 좋았어.”

얼마나 오랫동안 그는 바다의 물방울을 세고 또 셌을까.


“배고파. 컵라면에 물 부어 와, 맥주도.”

엉덩이를 털고 일어난 그가 작은 가게로 걸어가는 걸 보며 나는 쌀알같이 반짝이는 물방울로 밥을 지어 그에게 먹이는 상상을 한다. 새하얀 고봉밥을 양껏 먹은 그가 푸른색 돗자리 위에서 잠을 잔다. 쿨쿨 코를 골면서. 꿈속에서 그는 서툰 수영을 한다. 사랑하는 것들이 모여 있는 깊은 바다 속으로. 차마 마주 보지 못했던 죽은 물고기의 눈, 학교 가려고 나서면 마당 한구석에서 느리게 걸어 나와 그를 보던 고양이, 밤이 되면 바다를 수놓던 고기잡이배의 먼 불빛, 높은 절벽에서 다이빙하던 젊은 몸의 아빠, 모래사장에서 축구하던 어린 시절 친구들, 갯벌에서 조개를 캐던 엄마, 괜찮다고 조용히 괜찮다고 했던 사람들. 그들이 모여 영원히 살고 있는 그곳에서 그는 흰 고봉밥 같이 활짝 웃는다.

컵라면을 양손에 들고 맥주가 든 비닐봉지를 팔에 걸고, 한쪽 옆구리에 돗자리를 낀 그가 햇살 아래로 걸어온다.

"바다는 누워 있는데 우리는 앉아 있으니 몸이 자꾸 기울어. 우리도 여기 눕자."

우리는 돗자리에 누워 바다를 보았다. 눈동자의 절반까지 밀려 들어왔다 밀려 나가는 바다의 옆얼굴은 일정한 리듬만큼이나 평화로웠다. 둥. 둥. 둥. 모래 아래로 흐르는 바다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실은 나란히 누운 그의 심장 소린지도 몰랐다.

“나는 네가 잠시라도 쉬었으면 좋겠어. 눈 감고 좀 잤으면 좋겠어. 여기 이렇게 팔을 뻗고 그 위에 머리를 뉘어봐. 그리고 눈을 감고 한숨 자.”

나의 팔을 내어주고 싶었지만 내 팔은 지금 여기서만 유효하므로 그의 팔로 숙면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싶었다. 한쪽 팔을 뻗은 그가 나를 향해 누웠다. 눈을 감는다. 나는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바닷가에 산 적이 있어.”

“정말?”

“응. 고등학교 때. 아예 산 건 아니고 자주 갔었어. 엄마가 동해 바다에 있었거든. 새벽 4시 반에 첫차를 타면 8시쯤 도착하는데 한 달에 두 번 토요일이면 동생이랑 첫차를 타고 엄마한테 갔어. 방학은 거기서 보냈지. 지금은 새 도로가 나서 찾기 어렵지만 그때는 내내 바다를 끼고 달리는 국도가 있었어. 깜깜할 때 출발해서 가다 보면 금세 잠이 들어. 졸다가 빛 때문에 깨서 보면 바다에서 해가 막 떠오르는 거야. 생명이 있는 게 세상에 갓 태어날 때는 다 그런 얼굴일 거야.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온 힘을 다해 울음을 터트리는데 그렇게 맑고 힘찰 수가 없어. 아침마다 생명이 이렇게 솟아오르는구나 생각하면 새삼 벅찼어.”

하지만 나는 늘 달아나고 싶었다. 아침 해가 떠오를 때마다. 나를 바라보는 오해와 연민의 세계로부터. 내 왼팔도, 오른팔도 떼어내고 몸뚱이만 남는다 해도 누구의 무엇도 아닌 나 자신으로만 존재하는 몸이 되어 이 세계를 뒹굴고 싶었다. 하지만 내 팔 위에 다른 팔을 주렁주렁 달고 엄마의 딸, 동생의 언니, 누군가의 무엇이 되어 이 세계를 종종걸음으로 걸었지. 엄마의 병실을 지키는 일은 팔을 잘라내도 통증을 모를, 생의 감각을 잃어가는 일이기도 했는데 묵묵히 수행하는 것 말고는 별도리가 없었다. 나는 종종 병실 옷장에 숨어 긴 잠을 자고 싶었는데 그러기엔 나를 찾는 일들이 너무 많았다. 간이침대에서 밤새 뒤척이다 아침에 뜨는 해를 보며 출근을 하고, 저녁이 되면 다시 병실로 돌아왔다.


“많이 기다렸겠다.”

“뭘?”

“엄마 보러 가는 시간”

“응, 그땐 그랬지. 매일매일 기다리는 게 내 일이었지. 영영 잃는 것보단 낫다는 생각만 했던 것 같아. 지금은 기억도 잘 안 나.”

“기억이란 게 한 번씩 나의 기억인지 내가 만든 기억인지 헷갈려. 어릴 때 키우던 병아리가 어디로 간 건지 사라져서 울고불고했던 기억이 나. 매일매일 기다렸거든. 근데 이후에 병아리가 닭이 돼서 엄마가 그 닭을 잡는 걸 보고 또 엄청 울었어. 기억이 뒤죽박죽이야. 병아리를 병아리 때 잃는 게 나았을까, 닭이 되고 잃는 게 나았을까 지금도 헷갈려. 사라지는 건 같은데 말이야. 그런데 난 이제 사라진 것들을 기다리던 마음을 생각해. 네가 엄마를 기다렸을 시간 같은 거. 너를 만나고 네가 사라지고 다시 눈앞에 나타나길 기다리는 시간 같은 거. 영영 잃는 것보다 훨씬 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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