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분 남았어.”
해는 어느새 바다 근처까지 내려와 있었다. 저녁까지 병원에 돌아가려면 어두워지기 전에 버스를 타야 한다. 우리는 202호 마당에 돗자리를 남겨두고 터미널로 갔다. 결혼해서 타지에 사는 동생이 오랜만에 엄마의 병실을 지키는 사이 나는 어젯밤 딱 하루의 휴가를 얻었다.
“정말, 내일 아침 해는 못 보는 거였어.”
아쉬웠지만 익숙했다. 내가 상상했던 일들은 아주 드물게 하나씩만 이루어졌으니까.
병원 휴게실에서 그를 처음 본 순간을 기억한다. 심야 방송에서는 선거를 앞두고 물가 안정이니, 청년 실업 문제니 들먹이며 정치인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일찍 불 꺼진 병실이 땅속처럼 갑갑해 희미한 불빛이 있는 휴게실로 나오던 차였다. 소파 구석에서 한 남자가 물속에 잠겨 있는 사람처럼 미동도 없이 자고 있었다. 고개가 너무 꺾여있어 편히 기대도록 고쳐주고 싶단 생각이 들어 마음이 움찔했다. 미세한 휴대폰 진동음에 남자가 눈을 뜬다.
"응 엄마 알았어. 응 알았어. 응응. 가. 내가 가야지. 내가 갈게. 응.“
자다 깬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상대를 달랬다. 충분히 지친 한 사람이 쪽잠을 자다 또 어디로 가야 하나. 나는 난생처음 보는 그가 어디서든 잠을 이어가길 바랐다.
"609호 환자 보호잔데요. 네. 제가 일이 많아서 자주 올 수가 없어요. 일이 많아서. 네. 네."
며칠 후 간호사실 앞에서 다시 그를 보았을 때 나는 밝은 빛 아래에서 처음 그의 얼굴을 보았다. 병원의 흰 벽과 전등은 지나치게 밝아 그의 얼굴은 더 그늘져 보였다. 여전히 지친 얼굴로 이번에는 간호사에게 뭐라고 말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말을 하는 동안 숨이 조금씩 빠져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캄캄한 새벽 병원 복도를 걸을 때면 환한 빛 아래에서 측은하게 빛나던 그의 눈이 떠올랐다. 그도 나처럼 긴 잠을 잘 옷장이 필요할지도 몰라. 월수입과 지출, 잘 수 있는 시간과 이동하는 시간, 교대해야 하는 시간과 타야 하는 버스 번호, 버텨온 시간과 살아야 할 시간을 헤아리며 하루 종일 숫자를 세고 또 세도 도무지 계산이 서지 않는 날을 살고 있을지도 몰라.
쓰던 노트가 늘 있던 자리에 없다는 걸 알았을 때는 나는 몹시 허둥댔다. 불 꺼진 병실에서는 작은 휴대폰 빛도 지나치게 밝아 저녁을 먹고 휴게실에서 글을 썼던 기억이 났고, 늦은 밤 오가는 사람은 없을 테니 그 자리에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빛과 어둠이 얼기설기 직조된 희미한 휴게실 등 아래 그가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죄송해요. 보려고 한 건 아닌데 주인을 찾을만한 흔적이 있나 넘기다 보니”
“아. 네. 제 거예요.”
“작가 지망생이신가 봐요?”
“아뇨.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쓰는 거예요.”
“혹시 연필 좋아하세요?”
“네?”
“아, 다 연필로 쓰셨길래.”
“아. 글 쓸 때는 연필로 써요. 나무가 만져지는 게 좋아요. 쓰는 소리도. 지울 수도 있고요.”
다음번 휴게실에서 만났을 때 그는 2009년산 연필 한 다스를 내밀었다.
“2009년에 만들어진 게 15년 가까이 어디 있었을까요? 신기하죠? 도은 씨 생각나서 가지고 왔어요. 한 자루는 제가 깎은 거 있는데. 이거 먼저 쓰실래요? 연필 깎을 줄 아세요? 저는 연필 잘 깎아요.”
다음번 휴게실에서 만났을 때 그는 목도리를 내밀었다.
“이제 제법 추워요. 겨울이 오려나봐.”
병원 밖은 계절이 바뀌고 있었다. 병실 작은 공간에는 그가 준 것들이 조롱조롱 모여 앉아 계절을 알렸다. 우리가 처음 맞는 겨울이었다.
그는 몇 년째 차도가 없는 아버지를 이곳에 모셔두고, 그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돈을 벌고, 다시 시간을 쪼개 홀로 남아있을 엄마를 돌봐야 했다. 24시간 중 잠자는 시간과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일했지만 어떤 숫자도 그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이곳에 오려면 잠자는 시간을 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가 오기를 기다리다가도 그가 오지 않고 조금이라도 더 자기를 바랐다. 우리는 각자의 숫자 속에서 끊임없이 셈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서로가 내어줄 수 있는 건 그리움의 비탈뿐이었다. 휴게실에 나란히 앉아 그 비탈에 기대어 짧은 잠을 잤다.
“네 심장 소리를 들으면 잠이 잘 와. 네 심장이 내 옆에서 뛰고 있다는 게 나는 너무 안심이 돼.”
우리는 눈을 감고 기약 없는 이야기들을 나눈다. 낯선 도시에 내리면 우리는 둘 다 길치니까 정처 없을 수밖에 없겠지. 정처 없이 걷다가 어디든 들어가는 거야. 마주 앉아서 네가 글 쓰는 걸 보고 싶어. 넌 대체 이런 문장을 쓸 때 어떤 표정을 지을까 너무 궁금해. 글을 쓰다 낮잠을 자고 다시 일어나 글을 쓰고 배가 고프면 아주 천천히 밥을 먹고 다시 잠을 자자. 네가 글을 읽어주면 나는 눈을 감고 들을래. 그래 그러자. 응. 그러자. 언젠가. 언제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