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호> 5

by 남몰래

보고 싶은 마음이 100이라면 보고 난 후에는 99라도 되어야 하지 않나? 그런 계산은 맞지 않았다. 나는 그와 나란히 앉아 있는 순간조차 그가 보고 싶어 애가 탔다. 그간 소중한 것을 갖지 않으려 애쓰며 살아왔다. 마음이 가기도 전에 마음을 주지 않으려 붙잡았다. 무언가를 선택할 땐 부러 원하지 않는 것을 갖기도 했다. 지킨다는 건 기도할 일이 생긴다는 건데 나는 누구에게도 빌고 싶지 않았다. 신에게조차. 기도하고 매달리는 대신 원하는 것을 부정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 누구에게도 빌지 않아. 하지만 그를 생각하면 자꾸 손을 모으게 됐다. 원하는 마음, 기도하는 마음이 낯설고 두려웠다.


지호에게.

연필을 칼로 깎아본 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없는데 오늘은 네가 주고 간 한 다스의 연필에서 한 자루를 꺼내보았어. 깎아준 연필이 그새 뭉툭해지기도 했고, 나는 뭐든 널 따라 해보고 싶으니까. 2009년 10월이라니.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아 연필을 잘근잘근 물기도 했을 고3의 가을이 떠올랐어. 노래 가사를 연습장에 한바닥씩 쓰고 매점에서 빵을 먹으며 스티커를 모으고 옥상 자판기에서 캔 커피를 먹던 그때 말이야. 저녁시간이면 캄캄한 운동장을 내 짝 연이와 걸었는데 걔가 그랬어. 도은아, 초코바 아틀라스 있잖아. 그 아틀라스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인데 죄를 지어서 어깨에 하늘을 메고 있는 벌을 받았대. 그 얘기 듣고 부턴 먹기 싫어. 어깨 아파. 수많은 문장들은 다 사라지고 없는데 어째서 그 저녁 아틀라스가 이렇게 또렷하게 기억나는지 신기하지. 나는 그 초코바만 보면 왜 아직도 어깨가 뻐근한지.

제대로 깎아본 건 내 평생 처음인 것 같은데 이 정도면 괜찮은 편일까? 네가 준 것보단 심이 뭉툭해. 심은 어떻게 다듬는 거야? 칼로 사각사각 갈아내는 거야? 그 가루가 날리진 않아? 하나 쓰고 나면 네가 와서 또 하나 깎아주고. 깎아준 그만큼만 연필을 쓰면서 나는 너를 기다려. 조금씩 아껴 쓰다 심이 다 닳기 전에 너를 다시 만나는 거야. 그런 청승맞은 생각을 하다가 나는 칼을 쥐었지. 쓰고 싶은 만큼 내가 깎으면 그뿐! 그뿐이긴 한데. 십 년이 지나도 아틀라스만 보면 어깨가 뻐근한데. 이 연필 한 다스를 다 깎아 쓰고 나면 내 어디가 뻐근해질까. 이십 년 삼십 년이 지나도 떠올릴 때마다 칼 쥔 손이 아플까? 연필을 받친 세 번째 손가락이 저릿할까. 2009년도 이렇게 가까운데. 2023년에서 얼마나 멀리 가야 연필은 잊힐까. 나는 두려워.

결혼한 후로는 집의 기억을 지우려 애쓰는 동생에게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호준 씨 출장 갔어. 오늘은 내가 병원에 있을 테니까 언니도 하루는 어디 가서 좀 쉬어. 시간이 안 될 거라 생각하면서도 지호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 오늘부터 내일 저녁까지 어디든 갈 수 있는데.’

해 뜨기 전 캄캄한 병실에서 문자창이 깜빡인다.

‘그럼 나랑 가자. 어디든.’

작가의 이전글<202호> 4